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창을 열면, ...

지하련 2021. 9. 26. 17:44

 


팔을 들어 길게 뻗어 책상 너머 있는 창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한 쪽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공기를 보며 바람이라고 썼지만, 그냥 온도 차이로 생긴 공기의 사소한 흐름일 게다. 밤새 닫아 두었던 서재의 창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내가 지내온 서재, 혹은 책들이 모여 있던 곳의 창 밖 풍경은, 대체로 건조한 무채색이다.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서재는 딱 한 번 뿐이었고, 나머지들은 모두 벽들 뿐이었다. 지금 서재 창 밖은 바로 옆 빌라의 측면 외벽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창들이 있는. 서재에서 이십미터 정도 걸어 나가면 마을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그 곳으로부터 다시 이십미터 정도 나가면 시내버스가 다니는 도로, 다시 그 곳으로부터 이십미터 정도 가면 지하철역이 있다.

 

이 곳의 사람들은 도미노처럼 빼곡히 세워져 있는 사각형 박스들 안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그들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 빌라로 온 지 이제 4년 정도 지났다. 어쩌면 세월은 참 느리게 흐른다. 때론 빨리 늙어 이번 생을 끝내고 싶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어보면, 시간은 없고 오직 한 쪽 방향으로의 운동(흐름)만 있을 뿐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다. 이미 운동의 방향이 정해져 있고 시간도 정해져 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오직 한 쪽 방향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 불가능하다.

 

궁금한 건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뭔가 열심히 생각하는 내 의식도 이러한 운동(흐름)에 포함되는 것일까. 세포를 지나 무수하게 다양하고 많은 호르몬의 작용이나 뉴런의 미세한 흔들림도 이런 물리적 운동에 포함되는 걸까. 어떤 생리학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우리 몸에서 일어나서 무엇이 사랑인지 증명하기 어려웠다고. 그래서 르 클레지오는 우리를, 나를, 너를, ‘신비’라고 했던 것일까.

 

나는 오늘도 정해져 있는,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다만 그 신비가 나를 아프지 않게 하길 바랄 뿐. 

 

(* 요즘 곧잘 듣는 Rei Brown의 Bubble이다. 이십년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늘 이런 음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