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플로라 플로라,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하련 2022. 2. 19. 09:25

 

 

플로라 플로라 - 꽃 사이를 거닐다

시부사와 다쓰히코(지음), 정수윤(옮김), 늦여름

 

 

이런 책을 좋아한다. 도판과 글이 함께 실린 책들. 그림을 보기도 하고 글도 읽기도 하고. 한 때는 그림도 실리고 글도 읽고 책을 펼치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책을 상상한 적도 있었다. 그림이 함께 실린 이야기책이 아니라 도판과 글이 서로 대응하면서 미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책을 선호한다. 미술사, 혹은 예술사 책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그래서 내가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게 된 것일지도).

 

시부사와 다쓰히고(澁澤龍彦, 1928~1987). 처음 읽는 저자다. 책에 실린 간단한 소개 중 일부를 옮긴다.

 

사드의 <<악덕의 번영>>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1961년 외설문서출판으로 기소됐으며, 9년에 걸친 재판 끝에 유죄가 확정, 발행금지처분과 벌금 7만엔의 처벌이 내려졌다. 이때 엔도 슈사쿠, 오에겐자부로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를 지지했다. <<사드 선집>>의 서문을 부탁하며 친분을 맺은 미시마 유키오는 ‘이 사람이 없다면 일본은 얼마나 쓸쓸한 나라가 되었을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찾아보니, 다쓰히코의 책들 중 일부가 번역되어 있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흑마술수첩>>이나 <<동서기담>>이라니. 그러나 그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서양사에 상당히 깊은 이해를 가진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다. 하지만 검색해보면 이 사진이 나온다.

 

시부사와 다쓰히고

 

원래 서양에서 해골에서는 바니타스Vanitas의 상징이면서 지혜Sophia를 뜻하지만, 이를 알 턱 없는 이들에게는 해골을 안고 있는 남자는 기괴한 취미를 가진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실은 꽃도 바니타스의 상징이다. Vanitas는 라틴어로 ‘허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바로크 미술의 최정점에 함께 유행했던 정물화를 ‘바니타스화’라고 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함께 나오는 개념으로 삶의 허무, 유한함 앞에서 겸손함, 신중함 따위를 역설적으로 들어내곤 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Cogito ergo sum’로 근대를 밀어붙였다면, 그 옆에 서 있던 파스칼은 '저 무한한 우주의 영워한 침묵'을 떠올렸다. 그래서 바로크 양식은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저 도저한 바니타스를 극복해내는 양식,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크 예술을 설명할 때 '운동'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서로 반대되는 양 쪽으로 오가는 운동을 의미하며, 그래서 '두 개의 바로크'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바로크 양식에서 해석기학학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함수의 개념도 이러한 바로크적 운동에 대한  수학적 반영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크적 바니타스는 커녕,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살면서 꽃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자연에서 꽃을 볼 일은 없고 오직 가게에서 잘려져 판매되는 꽃만 보게 되니...그리고 꽃집에 진열된 것들 대부분 이름 조차 모르는 꽃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일까. 오랜만에 예전에 공부했던 바로크 예술이나 잘 몰랐던 꽃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그나저나 그토록 도톰하고 농염한 꽃을 피우는 동백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22쪽)

 

다행히 이 책에 등장하는 꽃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다. 그리고 이래저래 박학다식한 다쓰히코는 평면적인 꽃말이나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꽃과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동백꽃에 향기가 없다거나, 매화가 서양에선 인기가 없다는 것도.

 

예로부터 중국, 한국, 일본에서 귀한 대접을 받아온 매화지만, 어째서인지 유럽에선 전혀 인기가 없었다. 문학이고 미술이고 유럽의 예술 어디에도 매화가 없다는 건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29쪽) 

 

가끔씩 시를 옮기기도 하고, 꽃요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두견새 우는 음력 오월이 오면 붓꽃이 피네
정처없이 붓 가듯 사랑하고 있어라.

천 년 전 이름 모를 이가 지은 와카(和歌)가 내 마음과 같다. (75쪽)

 

 

화요라는 말이 있다. 꽃 화花에 요사할 요妖를 써서 꽃의 요괴 혹은 꽃의 요정을 이른다. (83쪽)

 

광주요에서 나오는 술 화요가 이 단어일까 하고 알아보니, 이 단어가 아니다. 불 화火에 중국의 삼황오제 전설에서 나오는 요 임금을 뜻하는 요堯였다. 이 한자가 아니라 화요花妖였다면 어땠을까.

 

겐트의 성당 제단화로 유명한 반 에이크의 ‘신비의 어린 양’ 상단과 하단 중앙부에도,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휴고 반데스 후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 중앙부에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중앙 패널에도 모두 매발톱꽃이 나온다. 화집에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후스의 제단화 중앙부 ‘목자들의 경배’ 앞부분에 패랭이꽃과 함께 화병에 꽂힌 자주빛 매발톱꽃을 찾아내는 것도 기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해 이탈리아 화가들도 매발톱꽃을 많이 그렸는데, 내가 본 바로는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피사넬로의 ‘지네불라 데스테의 초상’에서 매발톱꽃이 가장 잘 보인다. 젊은 여성의 옆 모습 초상 뒤로 붉은 패랭이꽃과 함께 자주색 매발톱꽃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102쪽~103쪽)

 

피사넬로, 지네브라 데스테의 초상





장미 하면 십여 년 전 가을에 방문했던 이란의 옛 도읍 이스파한과 시라즈의 정원이 떠오른다. (125쪽) 

 

아, 다쓰히코는 이스파한을 다녀왔구나. 너무 아름다워서 '세상의 절반'이라는 애칭을 가진 도시. 나도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시였다.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나폴레옹의 왕비 조제핀은 말메종 정원에 260종의 장미를 수집했다. (127쪽)

 

말메종 성 Château de Malmaison

 

조제핀은 저 장미들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장미에 푹 빠진 여인을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당신을 떠나온 이후로 쭉 우울했습니다.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내 행복입니다. 나는 쉴새 없이 당신의 손길, 눈물, 다정 한 배려를 되새기고 있을뿐입니다. 조세핀,당신의 비교 불가능한 매력은 계속 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 거리로 부터 해방되면 내가 당신 곁에서 당신만을 사랑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오 초라한 뮤즈여, 
너 과연 흰 백합을 칭송할 시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저 빛나는 순백색은 천상에서 내리는 눈과도 같고
저 황홀한 향기는 넋을 읽은 듯한 훈향과도 같다.
팔로스섬의 하얀 대리석도 그토록 희지 않고,
최상급 나르드 향유로 나의 백합에는 미치지 못한다.

라이헤나우 수도원 섬의 수도원장 발리프리트 슈트라보의 시다. (151쪽~152쪽) 

책은 재미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하나하나 찾다보면 시간은 참 잘 흘러가고. 대신 시간이 없는 상황이라 아쉽긴 하지만. 봄이 오기 전에 읽고 다가오는 봄, 꽃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나는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책을 찾아 읽어야겠다. 상당히 재미있을 것같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 출처: http://eknews.net/xe/siron_nondan/536067 (프랑스 유로저널 에이미리 기자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