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우크라이나 사태와 언론, 대선, 한국

지하련 2022. 2. 26. 04:17

 

내부 문제를, 그 문제로 인한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이나 대립을 외부로 돌리는 건 손쉬운 방법이다. 시스템이나 체계, 문화나 관습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그러나 많은 리더들이 이런 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실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인데.

 

그런데 흥미롭게도(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 참 잘 먹힌다.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는 <<대중의 지혜>>(랜덤하우스코리아)를 강조했지만, 이건 극히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해당되는 건 아닐까. 더 나아가 '정치적인 갈등을 야기하는 문제'에 대해 대중의 지혜를 기대해선 안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프로퍼간다에 호도된 그들, 대중은 가끔 파시즘을 불러오거나 군사독재를 묵인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상당히 복잡하고 이래저래 얽혀있다. 그러니 서구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언론을 믿어선 안 된다. 하긴 한국 기자들 중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제대로 읽어낼 기자가 있을리 만무하고. 교역량이나 교민의 수로 보자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많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나 우리에겐 소중한 국가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들은 일방적으로 서구 언론의 입장만 전한다.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안전하다. "전쟁을 반대한다"고.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가 '반-러시아'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 방향의 결론이 전쟁이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우크라이나의 문제가 아니라 강대국들 사이에 있는 모든 국가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이 예로부터 활에 집착했고 현대에 와서 포와 미사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국경 근처에서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던, 거대한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며, 기회가 생기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 바다 건너 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중국 속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의 물량에 견딘 국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은 그 중 한 곳이며, 지리적 장벽 없이 끝까지 남은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예전부터 한국은 강했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교수는 <<제국과 의로운 민족>>(너머북스)을 통해 중국에 편입되지 않은 한국의 비결을 '정체성'과 '지식'을 말한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중국인들보다 중국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 사대주의라 폄하할 수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사대주의'도 거대한 제국 옆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성리학은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 발달했다. 다만 그것이 19세기 이후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탓에 아직도 그 폐해가 남아, 이젠 미국 사대주의에 빠져 전시 작전 통제권 회수을 직업군인들이 나서서 반대하는 황당한 풍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러시아의 군대가 진입한 우크라이나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 대선을 보도하는 언론사들을 생각하면 참담해진다. 현 시점에서의 한국 언론은 오직 클릭을 통한 수익 창출과 악한 세력과의 결탁을 통한 보이지 않는 수익 창출이 생존 이유인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의 미래라든가 예로부터 언론이 가져야 하는 책임감이나 신뢰를 내팽개친 지 오래 되었다. 어쩌면 어떤 이의 주장대로 주류 언론에 속한 기자들 대부분은 특정 대학 출신이 대다수이며, 이들은 일종의 직업적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어, 그들 스스로가 기득권 세력의 비호세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언론사 간부들 대부분이 강남에 살고 있다는 것은 주류 언론에서 생산하는 부동산 관련 뉴스마저도 편향적이었던 것일지도.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도 염려하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염려하는. 

 

결론적으로 언론 종사자들은 이재명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으나, SKY는 아니니 말이다. 더구나 강남 친화적이지도 않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떤 이는 한국 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주류 언론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인터넷 시대를 맞아 닷컴 경제 언론사을 창업했다고 술자리에서 나에게 격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것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아마 고 노무현 대통령을 보면서도 그들 언론인들은 이재명 후보에 대해서처럼 동일한 감정과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대중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주류 언론에 실린 기사를 앵무새처럼 따라 읽고 반복한다(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에게 가해진 언론사들의 테러를 잊지 못한다. 그 당시 그들은 인간임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누구도 반성문을 올리지 않았다. 아마 자신들도 가련한 월급쟁이라며 주장할 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도 손님에게 잘못하면 바로 반성문을 올리는 시대가 지금이다. 그들은 언론인이라는 탈을 쓰고 비상적인 만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선 상당히 난감해진다. 모든 이들이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언론 기사를 읽고 비판적 접근할 수 있는 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과 수십년 전과 달리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고 결국 가난이 대물림되는 시대가 된 것은 그만큼 사회나 경제가 복잡해졌고, 아이의 교육 문제 뿐만 아니라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종잣돈(시드머니)를 모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모았다 하더라도 정보가 없으면 투자를 하지 못한다.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재명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따지면 참 안타깝지만(나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잘못된 정보라는 사실임을 알기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상징화된 단어나 표현들은 우리들의 사고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 생각을 고정시킨다. 이재명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게 고정된다. 그래서 고정된 어떤 인식을 가진 채 그를 만나면 놀란다는 의견이 많다. 의외로 대화가 되고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 주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성남에서 철거민을 도운 변호사였다. 철거민 옆에서 싸우다 보니, 젊은 시절 그는 언변이 상당히 거칠었다. 그리고 그가 전과 4범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검사를 사칭한 방송사 PD 옆에 있었다고 전과 1범이 되고, 부정 대출 사건에 대한 무료 변론 과정에서 급한 마음에 음주운전해서 전과 2범이 되고 시립병원 조례를 날치기 통과를 반대하며 화를 냈다고 전과 3범이 되고 선거 때 지하철 역 계단에서 명함을 주었다고 전과 4범이 되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모두 한국 사회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싸우다가 생긴 전과들이다. 그러나 상대편 후보는 가족 전체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부정비리 의혹으로 가득차 있지만, 주류언론에서는 그것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언론사 기자들이 그들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적도 없다. 

 

이 점에서 민주당은 참으로 무능하다. 청와대나 정부 관료들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검찰 개혁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대선후보를 제대로 알리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이재명을 둘러싼 무수한 오명과 유언비어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안타깝다. 지지할 정당이 없다는 건. 반대로 이재명이 민주당스러웠다면,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같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방향이라면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 또한 능력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기회를 국가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미국의 부유한 사람들이 얼마를 기부했다더라는 것이 아니라(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열악하면 부유한 이들이 나서서 기부하는가) 국가에서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정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이를 보면 황당함을 넘어 측은함까지 느끼게 된다. 사회주의적 이념은 이제 그 효력을 잃었다. 아, '국유화'를 주장한 진보정당의 후보를 보고 그의 심정은 이해했지만, 그런 식의 메시지는 너무 시대착오적이었다. 정의당이 진보적 아젠다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그들 대부분이 과거의 틀로 현재의 변화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언론의 잘못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위해 개개인이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왜냐면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계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경제적 불안이 없고 교육수준이 높아 언론의 맹점도 잘 파악하며 안정적인 삶과 여유를 가진) 엘리트들의 (경제적으로 불안하며 교육 수준이 낮고 매일매일 쫓기는 듯한 빠듯한 일상에 여유조차 없는) 대중에 대한 지배'가 더 공고해지는 건 아닐까.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국민 다수가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내 눈에는 이번 대선 구도은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공고해져온 한국 기득권 세력과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과 대결처럼 보여진다.  국내 최고 대학 법대(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대학이었던)를 나와 대단한 부를 가진 가족에 속한 검사 출신의 후보와 가난한 가족들 속에서 태어난 철거민을 변호하다가 관료가 된 변호사 출신 후보와의 대결.

 

지금 당신이 가진 자라면 누구를 지지하겠는가.

 

지금 이 시각 우크라이나에선 포성이 울리고 있을 것이다. 주류언론들은 현재 한국 정부에게 미국에서 줄을 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강요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군대 열병식을 본 것을 두고 미국 정부가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건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만, 주류언론들 어디에서도 그걸 말하지 않았다. 중국군 열병식에 참석한 박근혜를 두고 미국의 반응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들이 적어도 기사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 그것을 지적했어야만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동이 미국을 멀리 하고 중국과 가까워지려는 한국 정부의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정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그것이 지난 후에도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쓰레기 언론이라든가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진 지금, 그들은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방역을 강화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영업자들이 어렵다고 말한다. 방역을 강화하면 자영업자들이 어려워진다. 방역을 느슨하게 하면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진다. 예산을 확보해 자영업자들을 지원하고자 하면 국가 재정 문제를 말한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냥 지금의 정부와 민주당이 싫은 거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면 그냥 싫은 것이다. 결국 그들도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 나라의 미래라든가 젊은이들의 사정 따윈 관심없다. 그리고 제대로 된 기사를 통해 사회 비판적이며 바람직한 내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극적인 기사를 통한 광고 수익과 후원금 등을 통한 기부이나 원조를 바라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크의 세르주 알리미는 우크라이나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추락한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외교적 대결을 이용하는 정치 지도자로는, 조 바이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바이든은 크렘린궁의 주인에 필적할 만하다. 미국 언론은 “민주적인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이 세운 억압적인 국가에 전략적 위험이 될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민주화 세력을 부추길 수 있다”라는 분석을 내렸으며, 프랑스 언론은 이런 분석을 즉각 수용했다.
그러나 두 주요 야당의 지도자가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가난하고 부패한 우크라이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서, 크렘린이 공포에 떨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우크라이나가 터키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가 시민의 자유를 적극 수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르몽드디플로마크, 2022년 2월호)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 그러니 강해져야 된다.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그것은 일방적인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글이 길어졌다. 자기 전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기도를 올려야겠다. 어떤 이유에선 전쟁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