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코로나 19의 봄

지하련 2022. 3. 28. 09:39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럴 나이가 되었고 그럴 위치에 올라왔으며 그럴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디테일에 강해야 된다고 말하는 시대이니, 나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확실히 17세기 유럽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근대성Modernity이란 기본적으로 바로크Baroque적인데, 어떤 목적(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을 극복해내려고 한다. 상당히 전투적이다. 과감하다. 푸생도 그렇고 루벤스도 그렇고 렘브란트도 그렇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양식)에서의 작은 차이들이 있을 뿐, 기본적인 태도는 근대적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목표를 향해 가면서 겪는 고통마저도 고귀하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루젼이다. 환영주의다.

 

아직도 근대의 영향권 안에 있는 우리는 목적(목표)를 달성하는 그 짜릿함을 끊임없이 학습한 탓에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힘들고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한다. 바로크적 양식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바로크적 양식을 의도적으로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말년의 미켈란젤로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19는 근본적으로 서식지를 잃어버린 야생 동물로부터 건너온 것이다. 문명과 야생의 대립은 고대에서부터 그 양상을 달리하며 현대로 이어진다. 지금은 인수공통전염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재 남미의 아마존은 불타고 있다(브라질은 아마존 개발을 통한 막대한 부를 기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브라질은 기후 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지만). 그리고 그 미래 모습은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일지도 모른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비극은 초기 인류의 무분별한 경작과 살육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인류는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의 멸종 직전까지 가야 될 지도 모를 일. 

 

바로크적 문명에게 있어 코로나 19도 극복해야 될 대상이다. 야생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영역이 아니라 정복하고 개간하고 문명화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중세 때에는 야생은 미지의 것, 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면, 바로크로 오면 오늘은 모르지만 내일은 알게 될 곳, 언젠가는 정복하게 되는 곳이 된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나도 근대인이니. 

 

외출을 하다가 골목길 화단에 있는 나무에 새싹이 난 걸 보니, 신기했다. 3월이긴 했지만, 너무 추웠던 탓에 겨울옷을 입고 다녔는데, 나무들은 새싹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수치와 정보로 3월이지만 봄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수치와 정보가 없는 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준비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잠시 생각했다. 다양한 수치와 정보도 일종의 일루션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늘 제 자리에만 빙빙 돌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