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가을,잡생각,들

지하련 2022. 10. 14. 18:48

 

쫓기듯 급하게 휴가를 냈다. 그냥 쉬고 싶기도 했고, 아이의 성당 숙제를 도와주어야 하고, 부동산 계약 건도 있다. 치과에도 가야 하며 공부도 해야 하고 저녁에는 성당에도 가야 한다(과연 하루만에 다 할 수 있을까). 직장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들 대부분은 아이와 함께 한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십년 전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성당에 나가게 될 줄.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후회와 연민이 쌓인다. 며칠 전 출근길에 소방차들 수 대가 이차선 이면도로로 싸이렌을 울리며 올라갔다.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아래쪽 동네 어느 빌라에서 불이 난 것이다. 내가 탄 마을버스는 앞으로 가지 못했고 연기가 도로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다들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내리막 도로 위로 물이 흘러내렸고 건물에서는 뿌연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방서가 없다면, 아마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물을 떠 와 부었을 것이다. 화재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 전통(중세) 공동체의 기능 일부를 국가가, 일부는 우리가, 일부는 종교시설이, 일부는 사라졌다. 한국만 이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내 고향 출신의 어느 교수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오늘날 견지에서 보면 흡사 중세처럼 느껴지는 삶의 세계에 속했다. 기껏 50년 전만 해도 실제로 그랬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혁이 일어났다"라고 썼다. 이 말은 나의 어린 시절에도 딱 들어맞는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당신의 농업을 '중세적'이라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19세기 이후로 진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육체노동, 자급자족, 전통적 관습이 지배했다. (<<헤르만 지몬>>, 헤르만 지몬, 37쪽(쌤앤파커스)) 

 

내가 도시(마산)로 이사하기 전까지, 개발되기 전 창원에 살았고, 하루에 시내버스가 두 번 왔으며 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 30분에서 1시간 이상 걸어갔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 정월대보름이면 쥐불놀이를 했고 대나무를 세워 집처럼 만들어 불 태웠다.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정월대보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 당시 살던 마을 앞 호수물의 절반은 민물이고 절반은 바닷물이었다. 이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여 매해 쌓여가는 퇴적토들로 가로 막혀 호수가 되었다. 그래서 내륙의 호수처럼 민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바다도 아니었다. 그러나 물은 바닷물처럼 짰다. 지금은 인근의 주남저수지만 말하지만, 내 어릴 적 마을 앞 그 물가들을 그대로 두었다면 지금이면 상당히 흥미롭고 생태학적으로도 무척 귀중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무수한 철새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을 텐데. 지금은 주택가로 바뀌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창원은 도청소재지이자, 계획도시가 되었다. 그 짠물의 호수 위로 흙이 덮였다. 다시 그 위로 주택들이 들어섰다. 지금도 가끔 여름에 비가 많이 올 때 마침 합포만 만조 때와 겹치면 물이 가득 차는 수해지역이 된다. 예전 한창 건물들이 들어설 땐, 땅을 파다가 짠 물을 퍼내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룸 근처에서 찍었다. 이것만 보면 참 서울스럽지 않은데... 사진은 인위적인 이유는 사각의 프레임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금방이라고 하지만, 이는 현재에서 과거를 볼 때 그런 것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 몸이 자주 아프고 이젠 마음도 연약해졌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어렵고 책임만 늘어난다. 나이가 들면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 여겼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 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다만 나이와 상관없이 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며 매일 매일 성장하려고 노력한다. 남는 건 성실성 밖에 없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