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불안

지하련 2022. 12. 3. 15:01

 

휴가를 내어도 마음은 불안했다. 전화가 무서웠다. 예전엔 이 정도까지 아니었다. 현대인 대부분은 이럴까. 아마 대부분 이럴 것이다. 불확실성은 우리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강조되는 불확실성. 연역법의 시대가 지나고 귀납법의 시대가 되었다. 합리론은 폐기되고 경험론이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경험론이 강조하는 불확실성은 인간 이성의 오만함을 경고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그 오만함을 지탱하기 위해 합리적 이성(?)이 결정 가능한 세계를 제한하고 이 안에서의 합리적 결정을 위한 다양한 이론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그 복잡성 위로 수학을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경험론의 시대에 복잡성을 강조하며 이를 해결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밀어붙인다. 아니 결정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세계는 더 복잡해진다. 위험을 공학적으로 분석하고 통계와 확률로 의사결정을 돕는다. 그리고 여기에 실패하더라도, 여기에 참여한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살아남고 더 잘 나간다. 어쩌면 우리의 불안과 현대 세계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서로를 고조시키며 파국을 향해가는 듯하다. 한병철이 이야기한 피로란 이것일 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신을 혹사시키면서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를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돕는 무수한 정신 관련 약품들(술과 마약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이 있으며 수많은 병원과 전문가들이 있으니

 

문명의 몰락은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통제할 수 없는 복잡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견된 몰락 앞에서 우리의 불안은 사라질 종류가 아니다. 막스 프리쉬의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주인공도 공학자이다. 파국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랑은 위선이다. 거짓말이다. 네 미소는 결국 내 눈물로 바뀔 것이며 우리는 아무런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현대 물리학은 결정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합리론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도구적 이성에 제시하는 결정론이 아니다. 도리어 신학에 가깝다. 그냥 애초부터 우주는 정해져 있는 방향대로 흘러가며,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길 뿐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시간들이 병렬로 구성되어 쿠퍼 앞에 나왔을 때, 그 모습이 그나마 결정된 우주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결정론을 시각화한 것이다. 

 

결국 불안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불안이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일종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기 리추얼(ritual, 제의적)을 이야기함이 적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의 산물들은 우리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궁지에 몰아붙이며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우리가 만들고 참여하고 있는 어떤 복합성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 복합성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너에 대한 모든 것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 둘 삶을 단순화시키고 정신을 단순화시켜야 한다. 현대의 미니멀리즘이 반-문명적 기조를 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이 불안을 그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화 <<호모 파베르>>에 샘 셰퍼드와 줄리 델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