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Deborah Levy

지하련 2023. 1. 24. 17:54

 

알고 싶지 않은 것들 Things I Don't Want To Know 

데버라 리비Deborah Levy(지음), 이예원(옮김),  플레이타임

 

 

내가 Deborah Levy에 대한 글을 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번역되지 않고 그녀의 에세이만 나와있는 건 다소 의아스럽다. 그러나 어쩌면 누군가가 소설을 번역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동시대 외국 소설에 대한 독자층은 상당히 얇은 것일지도. 

 

몇 편의 에세이가 담긴, 이 짧은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20세기 이후 본격화된 여성 예술가들의 존재는 현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존 예술사에선 보기 드문 목소리, 태도, 시각, 표현 방식을 선사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고,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던 현대 문명에 대한 반성을 보다 다각적인 방면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아마 남성 예술가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어떤 것들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 점에서 나는 뤼스 이리가라이의 생각, 타자를 포용하는 여성성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 여성예술가들에게 있어, 타자란 자신의 생애 안으로 들어오는 구체적이며 소박한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다. 이리가라이는 임신이라는 생물학적인 계기에 대해 많은 가치를 부여하였는데, 심지어 혈액형까지 다른 아이를 뱃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여성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품고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가에 대해 언급되진 않지만, 여성 예술가들 대부분 그것이 가지는 고통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름답고 처연한 노래를 부른다. 때론 전투적으로 절망하며, 세상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은 파괴하지 않는다. 결국은 보듬고 이겨내며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 이 에세이집이 가치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 될 것이다. 

 

그해 봄, 인생살이가 어지간히 고되고 내 신세와 전재하며 어디로 가야 할 지 통 보이지 않아 막막해 하던 때에, 나는 기차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유난히 많이 울었던 것같다. 내려갈 때는 멀쩡한데 가만히 서서 위로 운반되다 보면 감정이 북받쳤다. (8쪽) 

 

살아가는 게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넋놓고 놓아둘 때도 있지만, 그럴 때 일수록 바깥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왜 그리도 따사로와 보이는지 알 턱이 없다. 데버라 리비는 자신의 현재와 유년시절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가의 삶에 대해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진지하거나 심각하진 않다. 그 점에서 지나치게 우울해지지 않는다. 살짝 힘든 여행이라는 느낌 정도랄까. 그러나 그 여행에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기억을 구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내 다른 기억들에 관해서라면 알고 싶지 않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원한 건 새로운 기억었다. (100쪽) 

 

새로운 기억이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보다 나은 삶이나 인생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며 개척해 나간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실정은 오히려 남편의 사랑이 그를 그 자신의 인생 밖으로 내몬 꼴에 가까웠다. (30쪽) 

 

내가 앞에서 여성 예술가의 존재를 현대의 축복이라고 한 것에 대해 다시 말하자면, 남성이 고전주의 비극의 주인공을 도맡아 하던 시기는 지났음을 뜻한다. 이제 위대한 고전주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여성 예술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리아도 나도 21세기의 와중에 도망갈 곳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난 깨달았다. 이름이 아망틴이기도 했던 조르주 상드가 19세기에 그러했고, 자마이기도 한 마리아가 20세기에 숨을 돌리며 쉴 곳을 찾고자 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정치의 언어가 숨기는 거짓말로부터 도주 중이었으며 우리의 성품과 생의 목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신화들로부터 도망 중이었다. 모르긴 해도 우리 스스로의 욕망으로부터, 그게 무엇이건, 도망치는 중이기도 했을 테다. 고로 웃어넘기는 것이 최고였다. (133쪽) 

 

도망 가서도 마주 하는 건 자신의 기억이며, 삶이며, 일상이다. 데버라 리비는 도망이라는 표현을 하였으나, 그것은 새로운 기억이며, 찬란한 고통과 상처이며, 어느 순간 영광이 될 것이다. 

 

짧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독서였다. 그녀의 소설도 한 권 구해 읽어야 겠다. 

 

데버라 리비 Deborah Le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