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앨버트 O.허시먼

지하련 2023. 2. 5. 13:05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Exit, Voice, and Loyalty: Responses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앨버트 O. 허시먼 Albert O. Hirschman(지음), 강명구(옮김), 나무연필 


Exit, Voice, and Loyalty(1970년도 최초 출간)



앨버트 허시먼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경제학과 정치학 사이의 미묘한 영역으로 들어가, 통찰력 있는 주장을 담은 책들 때문일 것이다(실은 정치학에 가까운 책들이다). 이 책, 또한 경제학과 정치학 모두를 아우르며 모든 조직들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퇴보, 위기 상황 앞에서 그 조직의 고객/구성원/이해관계자들은 어떻게 대응하며 움직이는지, 그 양상들이 가진 의미와 결과에 대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논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마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 것일까 하며 탄식할 지도 모른다(나는 그랬다). 다만 읽기 편한 서술 구조는 아니어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다소 내용이 반복적이며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함수 차트 등은 다소 방해되었다). 그래서 절반 정도 읽다가 다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기업 뿐만 아니라, 학교, 공기관, 정당 등 조직의 모든 형태들에 적용될 수 있는 이탈과 항의 등의 양식에 이야기하고 있으며 , 실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여러 차례 경험할 수 있는 주제들이라 더욱 크게 와닿았다. 특히 공기업이나 공적 제도, 정치 조직(정당)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1)고객이 더 이상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거나 회원이 조직을 탈퇴한다. 이것이 이탈exit 방식이다. 그 결과 이윤이 하락하고 회원 수가 줄어든다. 이런 사태의 원인을 알아내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2)기업의 고객이나 조직의 회원은 경영진 혹은 상부 기관에 직접 불만을 알리거나 여러 방식을 통해 이를 관심 계층에 전달한다. 이것이 항의voice 방식이다. 그 결과 경영진은 다시 한 번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 고객이나 회원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42쪽) 

 

이탈은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이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고객은 그렇게 움직인다. 하지만 독점 시장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용해야 한다. 독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서 이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공공 서비스이거나 제도일 경우, 또 상황이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서 품질에 민감할 수도 있고 가격에 민감할 수도 있다. 대체제가 있더라도, 고객이 이탈하더라도 공공 제도의 낮은 품질과 높은 가격은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다. 허시먼은 다양한 경우를 두고 고객, 사용자, 참여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가(크게 '이탈'과 '항의'로 수렴되는)에 대해 깊은 논의를 이어나간다.  

 

공공재로부터의 이탈은 어려우므로 공공재의 질이 떨어질 때는 항의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항의하지 않고 침묵하게 되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닌 공공악public evil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19쪽) 


공공시장에 대한 의미있는 통찰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 하나다. 그 부분을 읽으면 한국에서 자립형 사립고교와 특목고의 등장이 어떻게 공립 학교 시스템을 어떻게 무너뜨렸는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상황이 일반적으로 악화되면 안전, 청결, 좋은 학교 등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주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부유한 이웃의 거주지나 교외 지역에서 주택을 물색할 것이고 동네를 살리기 위한 시민단체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공립학교 대 사립학교의 경우로 되돌아가보면 공립학교는 사립학교와의 경쟁에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다. 첫째로, 공립학교의 질이 떨어지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는 아이들을 전학시킬 것이다. 이 부모들은 (질 높은 사립학교라는) 대안이 없었다면 가장 활발하게 교육의 질 저하에 맞서 투쟁할 사람들이다. 둘째로, 그 후 사립학교의 질이 나빠지면 이 부류의 부모들은 공립학교의 질이 떨어졌을 경우에 비해 사립학교에 더 오랫동안 아이들을 맡길 것이다. 그러므로 공립학교보다 교육의 질이 높은 사립학교가 공립학교와 병존할 경우 교육의 질이 떨어지면 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에서 ‘내부로부터의’ 투쟁이 강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공립학교의 경우 이탈이 강력한 원상회복 매커니즘이 아니기 때문에(사립학교의 경우 수지타산을 맞춰야 하므로 이탈 방식이 더욱 강력한 원상회복 매커니즘이다) 이탈 방식이 실패하면 덩달아 항의 방식도 효율적일 수 없다는 난해한 문제가 발생한다. (113쪽) 

 

이탈과 항의는 낮아진 품질을 높이기 위한 고객(사용자)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 수단이 먹히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점에서 이 책의 논의는 경제학에 머물지 않고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진다. 아마 대부분 독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여기일 것이다. 



경제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더욱 근본적인 갈등에 지나치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내재적인 회복력은 언제나 상호 배타적이진 않지만 때로는 서로 상반되기도 하는 이탈과 항의라는 두 영역으로 매우 깔끔하게 분류된다. 이탈은 경제의 영역에, 항의는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57쪽) 

 

첫째, 교육 문제와 연결시켜보면 일반적으로 ‘삶의 질’로 개념화된 다수의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의 방식이 특히 중요하다. (115쪽)  

 

경제학적인 논의에서 시작된 이 책은 정치와 역사를 이야기하며 항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충성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간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면 이탈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항의 방식이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라는 전망에 달려 있음이 분명해진다. 고객들은 항의가 충분히 유효하다는 확신이 서면 이탈을 늦출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요의 품질 탄력성, 즉 이탈은 고객들이 항의 방식을 택할 능력과 의향에 달려 있는 셈이다. (91쪽)

 

이탈을 할 것인가, 항의를 할 것인가은 사람들의 몫이지만, 어느 경우에 이탈하고 항의를 하게 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허시먼은 경제학자답게 이를 도표화하여 제시하고 있지만, 실은 이탈보다는 '항의'라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충성심’ 때문에 제품 A를 버리지 않는 부류가 있다. 이는 합리성이 적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비합리적인 방식도 아니다. 이 ‘충성파’들의 상당수는 제품 A의 정책과 관행을 바꾸는 행동에 적극 참여하겠지만, 나머지는 단순히 상황이 좋아지리라는 확신에서 이탈을 거부하고 고생을 견딜 것이다. 따라서 항의 방식은 상황을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려는 시도 안에 매우 넓고 다양한 활동과 리더십을 포함한다. 그러나 항의 방식은 항상 쇠락하는 기업이나 조직에 ‘집착’하는 결정을 수반하고, 이 결정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1) 자신 혹은 타인의 행위가 제품 A를 생산하는 기업이나 조직을 ‘원위치’시킬 가능성에 대한 평가.
(2) 다양한 이유에서 지금 바로 이곳에서 활용 가능한 제품 B의 확실성을 (1)에서 언급한 가능성과 맞바꾸는 것이 가치 있다는 판단 (?쪽)

 

충성심은 이탈과 항의 사이의 전투를 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은 충성심의 결과로 조직에 좀더 오래 묶여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충성심이 없었던 경우에 비해 더욱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철저하게 준비해 항의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충성심은 이탈이라는 별로 충성스럽지 못한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160쪽)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항의 대신 이탈을 선택을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미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탈 방식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배경을 알 수 있다. 기업, 조직을 지나 역사적 배경 또한 정치나 공적 영역에서의 이탈와 항의라는 선택지에서 이탈이 높은 비율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항의로 인한 소란과 비판보다는 이탈을 통한 깔끔함을 선호했던 미국의 경험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왔다.” 유럽으로부터의 이탈은 미국 내에서도 서부 개척을 통해 재현되었고,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이를 “과거의 굴레로부터 탈출하는 문”이라고 규정했다. 동부에 거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서부로 가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것이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을 제공했으므로 신화의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199쪽)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이탈을 선호할까, 아니면 항의를 할까, 아니면 침묵할까. 옆 나라 일본은 침묵이 많은 것 같다. 퇴보나 몰락 앞에서 침묵이나 방관은 치명적이다. 최근 공공 요금의 인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대외 환경이 좋지 않아졌고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도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가피하게 요금을 올릴 수 밖에 없을 때, 여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여기에 대해선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잘못을 전 정부 탓으로 핑계 댈 때, 아, 이토록 무능한 정권을 또 이 나라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지했음에 솔직히 참담했다. 무능한 언론들은 그 핑계를 그대로 옮겨적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언론사의 경영진 문제를 떠나 이젠 언론 종사자들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레기라는 단어 조차 아깝다. 철새인 기러기들을 모욕하는 단어다. 

 

안타깝게도 이제 한국 사람들은 침묵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나는 침묵하려고 노력 중이니. 허시먼의 이 책은 놀랍도록 정치 조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이탈과 항의는 서로 돌아가며 채택되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될 사항은 이탈도 먹히지 않고 항의도 먹히지 않을 때다. 지금 한국은 이탈과 항의, 어느 것도 먹히지 않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그저 그냥 지켜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항의의 방식이 활성화되길 기대해본다. 이탈이나 침묵이 아닌. 

 

앨버트 O. 허시먼의 이 책을 추천한다. 아마 여러 번 읽게 될 것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명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앨버트 O. 허시먼 Albert O. Hirsch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