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하련 2023. 2. 18. 06:34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최근 새삼스럽게 뒤라스를 다시 읽으면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라스를 찾아 읽는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뒤라스를 읽지 않았던 사이, 낯선 그녀의 책들이 번역되어져 있었고, 아직도 뒤라스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감동했다. 사람을 만나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던 시절이 이제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그 때가 그립다.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사랑에 빠졌던). 

 

 

 

올리비아 랭와 데버라 리비의 글에서 만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책에서의 뒤라스와 겹친다. 올리비아 랭에게 뒤라스는 (과격하게) 술을 좋아했던 예술가 뒤라스였다면, 데버라 리비에게서 뒤라스는 남다른 통찰을 보여준 여성 작가였다.

 

연기는 텍스트가 가진 것을 오히려 덜어 낼 뿐,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연기는 텍스트에서 존재와 깊이를, 근육과 피를 제거한다.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8쪽)

 

이 책 <<물질적 삶>>은 노년의 뒤라스가 직접 펜을 들고 쓴 책이 아니다. 일종의 구술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책으로, 뒤라스는 이 책을 내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진짜 뒤라스를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얀 옆에서 서 있던 노년의 뒤라스가 아니라, <<그게 다예요C'est Tout>>의 뒤라스가 아니라, 혼자가 된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살았던, 베트남에서의 어린 뒤라스였다. 뒤라스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만,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체념도 아니다. 그저 하나 하나 단편적인 기억들이 모여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된다.

 

사물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바다 앞에서, 삶 앞에서, 자기 육체의 한계 앞에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다가갈 수 없는 숲의 나무들 앞에서, 영원히 떠날 듯 가는 여객선의 출발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던 어머니 앞에서, 그 슬픔이 어린애 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머니를 빼앗길까 봐 두렵게 했던 그 슬픔 앞에서 알게 된 불가능. (90쪽)

 

작지만 단단한 책이다. 단단하지만 부드럽다.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날카롭고 슬픈 기억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읽다 보면, 왜 뒤라스가 이 책 내기를 주저했을까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젊은 동성애자 얀은 뒤라스 옆으로 와서 뒤라스 옆에서 같이 살아간다. 이성애자인 여성 뒤라스와 동성애자인 남성 얀이 만나, 얀은 뒤라스의 죽음을 지킨다. 

 

이성애는 위험하다. 두 욕망이 완전한 쌍방성에 이르기를 바라게 된다.
이성애 안에는 해답이 없다. 남자와 여자는 화해할 수 없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되풀이하는 그러한 불가능한 시도가 바로 이성애의 위대함이다.
동성애에서 사랑은 동성애 그 자체다. 동성애자가 사랑하는 연인은 자기 고향과 자기 창조와 자기 당이다. 연인이 아니다. 동성애는 그렇다. (48쪽)

 

어쩌면 위 문장들은 얀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뒤라스의 곁을 스쳐지나갔던 이성애자들이었던 남자들은 없고 동성애자인 남성만이 노년의 자신을 지켜주는. 

 

집은 가족의 집이다. 아이들과 남자들을 두기 위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에 붙잡아 두기 위한 곳이다. 방황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들의 것이었던 모험과 탈주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곳이다. 이 주제를 다룰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집이 의미하는 시도, 아이들과 남자들 공통의 집결지를 찾겠다는 그 어처구니 없는 시도에 대한 여자들의 생각, 우툴두툴한 데 없이 매끈한 그것을 아는 일이다. 
유토피아는 여자들이 창조한 집에 있다. 자신의 가족이 행복 자체가 아니라 그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여자들의 시도, 여자들이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그 시도에 있다. (55쪽) 

 

이 책은 뒤라스의 짧은 생각들, 기억들,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어떤 일관성이나 체계를 지니지 않는다. 심지어 그 때 그 말을 할 때의 뒤라스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값진 책일 수도 있다. 위 문장은 데버라 리바가 그녀의 책에서 인용했다. 

 

글을 쓸 때 작용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쓰게 될 것은 어둠 속에 이미 있다. 쓰기는 우리 바깥에, 시제들이 뒤섞인 상태로 있다. 쓰다와 썼다 사이, 썼다와 또 써야 한다 사이. 어떤 상태인지 알다와 모르다 사이. 완전한 의미에서 출발하기. 의미에 잠기기와 무의미까지 다가가기 사이. 세계 한가운데 놓인 검은 덩어리라는 이미지가 무모하지 않다. (37쪽)

 

미처 말하지 못한 것, 미처 쓰지 못했던 단상이 이어진다. 영화와 소설 사이. 연극과 소설 사이. 결국 뒤라스는 소설가였다. 

 

죽음,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또한 기억이다. 현재와 같다. 일어난 일의 기억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의 기억처럼, 온전히 현재다. 지나간, 차곡차곡 쌓인 지난 봄들의 기억이고, 하나씩 돋아나는 나뭇잎. 다가오는 봄의 기억이다. 그것은 또한 일억칠천사백만년전 별의 폭발, 1987년 2월 어느 밤에 지구에서 볼 수 있었던 별의 폭발이다. 어느 낮 어느 시각에 잎이 돋아났는지처럼, 정확한 시각이다. 죽음은 바로 그 현재다. 당신은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82쪽)

 

죽음 앞에 있던 뒤라스. 노년의 뒤라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정신 착란 상태에 빠졌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얀의 편지, 그리고 얀에게 답장을 보내게 된 이야기며, 만나게 된 일화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죽음 앞에서 손을 잡아준 얀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혹은 거의 언제나, 모든 유년기에, 그 유년기에 이어진 모든 삶에, 어머니란 광기의 표상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그러니가 그 어머니의 아이들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이상하고 가장 미쳤다. 흔히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때 우리 어머니는 미쳤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미쳤다고요.” 우리는 어머니를 기억하며 많이 웃는다. 그러면 기분이 좋다. (63쪽)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왔을 때, 그 이후 베트남을 배경을 한 소설 등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어머니를 회상했다. 식민지 베트남에서의 어머니는 미쳐버릴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방파제가 무너졌으니까.

 

여자들은 그렇게 못한다. 여자들은 서로 물질적인 삶에 대해서만 말한다. 정신의 영역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극소수의 여자만이 아는 일이다. 아직 모르는 여자들도 많다. (51쪽)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겠으나, 계속 수전 손택을 떠올렸다.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뒤라스와 달리, 수전 손택은 실패했다. 소설가였던 뒤라스는 본격적인 비평을 하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으나, 수전 손택은 몇 편의 비평을 제외하곤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소설도. 하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보다 수전 손택이 더 유명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의도된 것일까. 뒤라스는 온전히 작가였으며 예술가였다. 그러나 손택은 끊임없이 정치력을, 영향력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일부는 성공했으나, 대체로 손택의 초기 비평서의 명성에 기댄 것이었으며, 20세기 후반 상황이 손택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을 뿐이다. 손택은 모든 것을 전투로 인식했다면, 뒤라스는 그저 자신을 돌아볼 뿐이었다. 미국적 상황과 프랑스적 상황이 달랐던 걸까. 너무 반대되는 스타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뒤라스는 왜, 프루스트보다 무질을 더 좋아한 것일까.

 

뒤라스의 소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읽기 시작했다.  "뒤라스의 밤"같은 행사(를 빙자한 술자리)나 하면서 술 마셨으면 좋겠다. 뒤라스, 투르니에, 모디아노, 끌레지오, 에르노,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를 이야기하면서. 가끔 루셀이나  자베스, 이브 본느프와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게다(희망자가 있다면 연락을 ... 2023년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될 지도).

 

뒤라스와 그녀의 오빠 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