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하련 2023. 2. 26. 15:17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지음), 최덕수(옮김), 열린책들 

 

 

<녹두장군>은 전설이 되었다. (149쪽) 

 

 

정조 이후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지 못한 듯 싶다. 이후는 세도정치 시기였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해봤자 가슴 아픈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으니(그야말로 조선 왕조가 가장 무능했던 시기, 어쩌면 임진왜란 시기보다 더 심했을 지도), 그냥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수십 년 전 버전이니, 지금 역사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끔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상황은 동일했을 듯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정치문화였다.  (16쪽) 

 

조선의 성과이면서 한계이며 현대의 눈으로 보자면 잘못된 것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들 중 하나는 유교적 민본주의로 인해 의병활동이 일어났으며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심지어 아래와 같은 경우도 있었다. 

 

의병은 여러 열강으로부터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또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자 총대장의 자리를 버렸다. 거기에는 유교적 명분으로 사는 유학자의 자세가 있었다.  (...) 

장례가 끝난 후 부하들이 진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나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충성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내가 3년상을 치른 후에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을 소탕하여 대한을 회복한다면 곧 이것이 효순(孝純)으로서 충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 (249쪽) 

 

이 책에선 언급되지 않으나, 그는 3년 상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채 1909년 문경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는다.

 

한국에는 문명 의식 차원에서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우월 의식이 있었으며,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정치 문화가 각계 각층에 널리 침투해 있었다. 단순히 위정척사파의 사상 뿐만이 아니라, 개화파의 사상도 유교적 민본주의에 구속당하면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세계도 공유하는 정치문화였다. 따라서 민중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기초하여 민란과 농민 전쟁을 일으켰다. 의병 전쟁에 나선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문화가 일본이 들여온 근대적 정치 문화나 폭력적인 정치문화와 심각한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6쪽) 

 

정치문화란 정치적 사건이나 항쟁이 일어난 시기에 그 내용이나 전개의 양상 등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전통, 관념, 신앙, 미신, 원망(願望), 관행, 행동규범(규칙) 등 정치과정에서 관련된 일체의 문화이다. 정치문화는 일반적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공유한다. 공유하지 않는 경우에는 국가나 정부는 안정성을 잃게 된다.(12쪽) 

 

그런데 이 유교적 민본주의가 얼마나 황당한가 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주체로 '국왕'이 등장한다. 

 

임술민란에서는 수령과 향리, 향임 등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지만, 사족이 이끄는 민중은 향리 등을 몇 명 살해하였으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한 수령은 국왕의 분신이었고, 살해는 역성혁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기껏해야 쫓겨나는데 그쳤다. 민중은 국왕이 파견한 선무사(宣撫使)나 안핵사(按覈使, 조사관) 앞에 엎드려 국왕의 인정을 애원했다. 민란에서도 법과 규율이 있었다.

재지 사족(在地 士族)과 민중은 반세기 이상에 걸친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을 이제 역성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국왕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를 통해 해소하려 했다. 안동 김씨 등의 꺾을 수 있는 것은 국왕 이외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기에서 국왕 환상이 갑작스레 고조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35쪽) 

 

근대적 시민 의식이 생겨나야 어떻게든 근대 국가로 나아갈 기반이 마련될 텐데, 유교적 민본주의가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은 경상도 단성(현재의 산청군 일부)과 진주에서 2월에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기 보다는 빈농이나 무전농민이 주체가 되고 지방에 낙향해 있던 양반들(재지 사족)을 지도자 삼아 봉기한 난을 통칭하는 것이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경기도, 황해도 등 전국 71개 읍에서 일어났을 정도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근(기아)에 대한 공포가 민중을 지배하고 있었다. 18세기에는 기근이 생기면 국가에서 1만석에서 4만석까지 지원하엿으나, 19세기에는 이런 것은 아예 없었고 기근이나 기아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마저도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1821년과 22녀에 있었던 콜레라로 인해 수십만명이 사망하였으며, 이 콜레라는 1859년, 1860년에도 다시 유행하였다. 그냥 막장인 나라였던 것이다. 결국 끼니 걱정을 하던 민중은 유민이 되었고 유민은 다시 도적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도적들은 활빈당이 되기도 하고 구한말 의병으로 다시 모이기도 하니, 유교적 민본주의은 나라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지음과 동시에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행동으로도 이어졌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의식 차이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숭문(崇文)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조선이 도리어 무위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일본 이상으로 완강히 저항했다는 점은 양국문명 의식의 차이와 크게 관련된다.(59쪽) 

 

이 책은 조선 내의 사건들과 여기에 대한 일본의 반응, 대응을 비교하며 서술되고 있다. 실제 내가 기대한 것은 조선은 어떻게 몰락하고 일본은 어떻게 조선과 합병했는가에 대한 자세한 정보였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19세기의 조선은 이미 몰락하고 있었던 나라였다. 심지어 일본과의 합병이 되지 않았다면 중국의 종속국가가 되거나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운명에 가까워 보였다. 

 

청국에서는 임오군란 이전부터 조선과의 종속관계를 전통적인 조공 관계에서 근대적인 제국 - 속국(식민지) 관계로 바꾸고자 하는 논의가 있었다. 사실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이 대표적이었다. (95쪽) 

 

굳이 러시아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광복 후 바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러시아의 부추김으로 인해 발발한 것에 가까우니.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죄사로 박영효를 정사(正使)로 하는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국기인 태극기는 이때 배 안에서 제작하여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박영효는 약관 22세의 젊은이였는데,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라고 하는 영예로운 작위를 받아 개화파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았다. (99쪽) 

 

박영호(일본명: 야마자키 에이하루)은 12살에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혼인을 하지만, 혼인 후 3달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한다. 왕의 사위는 평생을 혼자 지내야 하지만, 그렇진 않았다. 개화파였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일본에 머물면서 친일파로 돌아선다. 하긴 현실과 타협한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사로잡혀 자결을 하거나 독립 운동을 하였으며(이것도 근대적 국가 수립이 아니라 다시 조선을 세우기 위한), 현실주의자는 딱 봐도 답 없는 조선보다 차라리 근대화된 일본과 손을 잡고 나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주의라기 보다는 패배주의자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개항은 확실히 민중을 빈궁으로 내몰고 있었다. (124쪽)

 

개항을 한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의 경쟁이었으며, 안 그대로 먹을 것이 없었던 민중들은 그나마 나는 것들마저 딴 곳으로 가는 판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민중이 배외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1888년 한성에서는 외국인이 어린 아이를 유괴매매하며, 심장과 안구를 파내어 약재나 수프, 혹은 사진의 재로로 쓴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 있었다. (128쪽) 

 

우리는 19세기 유럽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을 알지만, 19세기 한성에 대해선 잘 모른다. 특히 일반 민중의 삶이나 문화같은 것에 대해선 더욱더. 유교적 민본주의가 필요한 시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의식이 필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은 근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민중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무력적으로 중개 세력을 배제하고, 일군만민의 논리에 호소하여 민중적 요구를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 년을 채우지 못한 기간이었지만 민중 자치를 실행하였던 조선 역사 상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148쪽)  

 

한성으로 압송된 전봉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저자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높지만, 그 당시 조선은 그냥 무정부 시기 비슷해 보인다. 중앙은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중앙집권적 조직 체계가 무너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독립협회에 대한 조삼모사식의 대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중은 대원군에게서 물려받은 책사적 일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매우 경솔하고 사려가 부족하였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너무 정실(情實)적인 인사는 총애와 경질을 반복하였고, 때로 믿기 어려운 사건까지도 일으켰다. (187쪽) 

 

대중문화 작품들에서 묘사되고 표현되는 고종이나 민비에 대한 모습에 대해 큰 우려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되었든 그들은 모두 무능했다. 미화시키거나 동정을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냉정하게 책임을 묻고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실은 아직도 우리는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한매일신보 편집실

 

결국 한일합방이 되고 난 다음에서야 계몽 운동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 지식인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기층 민중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기층 민중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19세기의 민란은 모두 유교적 민본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왕(세도정치로 인해 힘을 잃었던)이 제시되었던 셈인데, 그 국왕들은 한결같이 무능했기 때문에 이젠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당시 그(안창호)는 29세의 젊은이였는데, 연설의 명수로 귀국하자마자 각지로 유세하면서 돌아다녔고, 사람들을 민족주의에 눈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지 않아 조직한 것이 신민회였다. 회장은 윤치호, 부회장은 안창호가 취임하엿는데, 두 사람 모두 기독교였다. (254쪽)

 

신채호만큼 전통적 조선 사상과 격투를 벌이면서 올바른 근대를 계속 추구했던 사상가는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야말로 후쿠자와 유키치와 대비시킬 수 있는 근대 조선 최대의 사상가였다. (259쪽)

 

그러나 <암살>이었다고는 해도 이것은 테러와는 다르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으로서 정규 교전 행위로 이토를 사살한 것이었다. 전쟁을 집단으로 실시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그럼에도 전쟁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약소민족에게 남은 길이 <암살>이었다는 것은 비극적 현실이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국제 신의를 위배하고 있는 일본과의 일전을 주고 받으려고 당당하게 항변하였고, 국제법에 기초하여 재판받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그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안중근이 스스로 결행한 마지막 전쟁이었다. (291쪽)

 

책 후반부는 우리가 역사책이나 대중 작품들 속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특히 나에겐 신채호에 대한 저자의 높은 평가가 이례적으로 읽혔다. 신채호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터라. 안중근에 이르러 비극성은 그 정점에 이른다. 실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여 나라가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운 바가 없고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 듯 하다.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조선은 정지해 있었고 19세기 전반기는 세도 정치로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19세기 후빈기는 연이은 헛발질과 제국 열강의 속셈도 제대로 모른 채 끌려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객관화시키지 못한 조선 왕실이 있었다. 

 

한국 병합이 된 1910년 8월 29일 도쿄 시중에서는 집집마다 일장기를 걸었다. 니혼바시 인근 상가에서는 오후부터 휴업을 하는 곳이 많이 보였고, 축하주로 대접하였다. 사람들은 오후부터 거리로 몰려 나갔고, 꽃으로 장식한 전차가 왕래하면서 악대의 피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떠들석함 속에서 취기에 몸을 맡기며 만세로 환호하고, 여러 곳으로 몰려다녔다. 이러한 경축 풍경은 밤까지 이어져 니주바시 앞에서는 궁성을 참배하는 군중이 끊이지 않고 만세 소리를 외쳤다. (294쪽 ~ 295쪽)

 

19세기 도쿄 니혼바시 어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