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하련 2023. 3. 26. 14:25

 

 

태평양을 막는 제방 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이십 대 때 자주 읽었던 소설가들, 파드릭 모디아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르 클레지오, ... 압도적으로 프랑스 문학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많이 읽었던 건 아니고 한 권만 읽어도 그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허우적 되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독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때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읽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고, 읽었던 소설마저 이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읽었던 소설까지 다시 읽어야할 시기인가.  

 

이 소설이 프랑스 문단에 준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프랑스(제국)의 식민지에 건너간 프랑스인 가족의 밑바닥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본토에 있다가 식민지로 가는 제국의 국민들은 어떤 마음일까. 기세등등함과 함께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프랑스인 가족은 그렇지 못하다.

 

어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어머니는 늙었고, 너무 많은 불행을 겪었고, 웃을 일이 없었다. (52쪽)

 

 

여러 사건들은 이미 중첩되었고 시간은 절망적으로 흘러간다. 사랑은 없고 사랑을 갈구하는 못난이 조씨만 있다. 사랑은 메인 주제가 아니다. 가족애가 있으나, 그것은 가난의 뒤로 물러나 있다. 도리어 쉬잔의 조세프에 대한 마음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어쩌면 조씨는 이 소설에서 가장 선량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매력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소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연인>>과 함께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했지만, 뒤라스의 어머니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삶을 왜곡시켰다며 딸과 연락을 끊었다. 아마 뒤라스 가족의 삶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쉬잔의 가족만큼 형편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돈을 쏟아부어 얻은 평야는 해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땅이었고 경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 프랑스인 가족에게 놓인 것은 암담한 미래뿐이었을 것이다.

 

그 봉투 안에 내가 모은 돈 전부가, 나의 모든 희망과 살아갈 이유가, 십오 년 동안의 인내가, 나의 젊음이 송두리째 담겨 있었단 말입니다. 당신들은 자연스럽게 받았죠. 난 행복해하며 그곳을 나섰습니다. 그래요.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바친 십오 년의 대가로 뭘 받았습니까? 아무 것도, 그저, 바람, 그리고 물이었습니다. (294쪽)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 뭐든 할 기세로 어머니, 조세프, 쉬잔은 조씨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다이아몬드 반지가 계기가 되어 소설은 어떻게든 끝이 나긴 하지만, 기우뚱해진 내 마음은, 이 소설의 결말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슬플 뿐이었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그 지역은 그 지역에 살만큼의 인구만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약 6배의 인구 성장율을 보였지만, 식량은 1.5배 증가하는데 그쳤다고 한다. 아랍의 봄 시기 이집트에서의 시위는 어쩌면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의 성숙이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그냥 나라의 기반이 먹고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저 통계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뒤라스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끝없는 가난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스러운 내일을 가진 가족은 철면피들처럼 누군가의 등골을 파내며 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반도에 넘어간 프랑스인 가족이. 그러면서 유럽 중심주의를 은근히 비꼬는 것일까. 아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 그 의도는 뒤로 물러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강박적 의지만 남았을 것이다. 인도차이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 문단에서도 말이다.

 

그저 나는 아래 부분을 읽으면서 그냥 세상이 원래 이랬음을 깨달았다. 뒤라스의 자유로움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인도차이나에서 나왔음을, … 책을 다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랑 술 한 잔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내리는 비만큼이나, 주렁주렁 달린 열매만큼이나, 잦은 홍수만큼이나 아이들이 많았다.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혹은 곡식을 수확하듯, 혹은 꽃이 피어나듯 해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평야의 여자들은 남편의 욕망을 들쑤실 수 있을 만큼 젊기만 하면 매해 아이를 낳았다. 농사일이 한가해지는 건기가 되면 남자들은 우기 때보다 더 많이 사랑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계절에 여자를 많이 품었다. 그러고 나면 여자들은 배가 불러 갔다. 그러니까 이미 세상에 나온 아이들 말고도 여자들의 배 속에 든 아이들이 있었다. 식물의 리듬에 맞춰 마치 길고 깊은 호흡처럼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매해 여자들의 배가 아이를 품고 부풀어 올랐고, 아이를 세상에 내놓았고, 다른 아이를 품었다.

첫돌까지 아이들은 어머니가 배와 어깨에 걸친 면 포대기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는 혼자 머릿니를 잡을 수 있는 열두살이 될 때까지 모두 밀어버렸다. 옷도 없이 발가벗고 지냈다. 그 뒤에는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면옷을 입었다. 어머니는 돌 지난 아이를 더 큰 아이들에게 맡겨 두었다가 밥 먹을 때만 데려갔다. 밥을 입에 넣고 씹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백인이 혐오감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비웃었다. 백인이 느끼는 혐오감이 이 들판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곳에서는 어머니들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먹여 왔다. 아니 아이들을 몇 명이라도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애썼다. 너무도 많은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죽어서 이 들판의 진흙 속에 묻힌 아이들이 살아남아 물소에 올라타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너무 많이 죽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들은 더는 슬퍼하지 않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가 죽어도 무덤조차 만들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집 앞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죽은 아이를 눕히는 게 전부였다. 아이들은 아무런 절차 없이, 언덕 위에 자라는 야생 망고가 그렇고 냇가 초입에 사는 새끼 원숭이들이 그러듯이 그저 흙으로 돌아갔다. 덜 익은 망고를 먹고 콜레라에 걸려 죽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평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해마다 망고 열매가 열릴 때면 굶주린 아이들이 똑같이 나뭇가지에 올라갔고 혹은 나무 아래 서서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뒤에 많이 죽었다. 이듬해가 되면 다른 아이들이 똑같이 나뭇가지에 올라갔고, 또 죽었다. 굶주린 아이들은 덜 익은 망고를 놓고 참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냇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일사병에 걸리거나 눈이 멀어 버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떠도는 들개들과 똑 같은 기생충이 배 속에 가득 차서 숨을 헐떡이며 죽기도 했다.

사실 아이들은 죽어야 했다. 평야는 좁았고, 여전한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바다는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바닷물은 해에 따라 조금 더 혹은 덜 올라왔지만 어쨌든 매년 들판을 적셨고 수확을 앞둔 곡식을 말라 죽게 한 뒤 다시 물러갔다. 그런데 바닷물이 어디까지 올라오든 아이들은 악착같이 태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죽어야 했다. (119쪽 ~120쪽) 

 

 

마르그리트 뒤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