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얼굴 없는 인간, 조르조 아감벤

지하련 2023. 5. 4. 12:23

 

 

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지음), 박문정(옮김), 효형출판

 

 

배가 침몰 중인데, 우리는 배에 실린 화물을 걱정하고 있다. -  히에로니무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마스크를 둘러싼 논쟁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었다.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는 마스크를 잘 쓰고 다녔지만, 서구인들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며, 각자 생각하는 것도 다를 듯 싶지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모자도 잘 쓰지 않고 마스크도 잘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스크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둘러싼 논의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아감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으며 깊이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 바로 <<얼굴 없는 인간>>이다. 실은 마스크를 넘어서 전염병이라는 상황 속에서 국가는 각 개인에게 사소한 영역에서의 자유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감벤은 팬데믹의 상황을 성찰하지 않는 게으른 우리의 사유를 질타하는 것에 가깝다. (…) 아감벤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근대 국가의 정치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문제는 생물학적 생명이었고, 그래서 질적으로 나은 생명 또는 삶의 영위에 대한 고찰은 사소하게 취급당하거나 누락되어 왔다는 것이다. 팬데믹 상황은 이런 근대 국가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 이택광 (13쪽)

 

그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고민해 오던 것들, 자본주의적 장치의 세밀화로 점차 어떤 신성화도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접촉의 가능성이 사라져가는 이 내전 상태(stasis)에서, 희박해져 가는 자유의 기억,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묻고 있다. -남수영(한예종 영상이론과 교수) (19쪽)


책 서두에 이택광 교수와 남수영 교수의 짧은 글이 실려있는데, 이 책에 대한 독해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체계적인 이론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팸플릿 모음집에 가깝고 아감벤의 불평, 일부 지식인들의 사려깊지 못함을 따져묻는 것에 가깝다. 일종의 문제 제기라고 할까. 

 

한마디로 집에서 자가 격리를 하고 있는 일, 우정, 사랑 뿐 아니라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신념까지, 평범한 일상을 중지하는 중대한 결정을 사회 전체가 별다른 논의 없이 간단하게 받아들인 문제를 성찰하고자 한다. (51쪽)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 (138쪽)

 

얼굴에 대한 권리를 단념하고, 마스크로 덮고, 시민의 얼굴을 가리기로 결정한 국가는 정치를 스스로 없애 버린 셈이다. 매 순간 무한한 통제가 이뤄지는 공허한 이곳에서 개인은 타인들과 단절된 채 활동한다. 공동체의 즉각적이고 세밀한 지침을 따라 직접적인 메시지만 교환할 수 있다. 더 이상 얼굴 없는 이름으로. (148쪽)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남수영 교수의 평, 자유의 기억이라든가 사랑의 기억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평가인 셈이다. 일종의 믿음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국민들이 선출한 정치 권력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없어 마스크 착용이나 전염병을 억제하기 위한 자유의 제한이 실은 전염병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한 국가 정치 권력의 남용이며 어떤 정치적 목적이 숨겨진 과도한 억압이라고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조금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나, 저널 기고문 모음집이었다. 도리어 아감벤의 문제 제기에 대해 다른 이들이 너무 진지하게 대응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팬데믹이 거의 끝난 시점에서 읽은 이 책은 도리어 식상했고, 팬데믹 시기에 일어난 금융시장에서의 양적 완화가 현재의 금융 위기에 직접적인 결과가 아닌가, 마스크나 자유 제한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각국의 중앙 은행이나 금융 정책 당국은 이러한 상황이 예견하지 못했는가 따위에 요즘 더 관심이 가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펜데믹 이후의 세계는 펜데믹 이전의 세계보다 조금 더 나빠진 세계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펜데믹 이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니...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둔 내용이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십수년 전에 읽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이거 무슨 말이야 하면서 읽었던 터라. 더구나 정치철학책이 현실정치와 너무 멀리 떨어진 언어로 기술되어 있어서 상당히 황당해 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그 당시 다들 아감벤, 아감벤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인문학 전공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럴싸한 새 단어가 나오면 책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흥분부터 하는구나 생각했다. 서양철학사 몇 권을 읽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  <<호모 사케르>>를 읽고 이해하고 흥분하는 그들은 혹시 천재인가 하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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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사람 -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 즉 호모사케르의 생명” 
생명정치 - 삶 혹은 생명을 뜻하는 비타(vita)를 ‘조에(zoe’)와 ‘비오스(bios)로 구분하여 인식하는 고대 그리스식 전통에서 출발한다. 조에는 단순히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의미하고, 비오스는 집단의 방식, 즉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생명이다. 아감벤은 비오스와 조에가 분리된 생명을 ‘벌거벗은 삶’, 즉 호모사케르의 생명이라고 보았고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 혹은 난민을 근대사회의 ‘벌거벗은 삶’으로 설명했다. (역자의 주석 중에서)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니, 모든 것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죽는 법을 아는 것은 우리를 모든 복종과 제약에서 해방한다.” - 미셸 드 몽테뉴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이라는 걸작을 통해 접촉에 대한 두려움이 권력의 기반이 되는 ‘군중’과 연관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58쪽)

 

“시인의 언어는 항상 죽은 언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느끼겠지만, 사유에 더 큰 생명을 주기 위해 사용되는 죽은 언어” -  파스콜리(Giovanni Pascoli, 1855 ? 1912), <귀환 Il Ritorno>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