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요리하는 나에 대한 반성

지하련 2023. 5. 16. 19:15


냉장고에서 길을 잃어버린 무우 하나가 몇 달째 냉기를 먹으며, 한때 딴딴하고 신선했던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숙취와 스트레스의 바다 속에서 겨우 살아나와, 푸르딩딩한 겉이 살짝 물렁해진 무우를 꺼내 껍질을 도려내고 네모나게 잘랐다. 하나, 하나, 하나 그릇에 담고는 꽃소금 몇 스푼을 뿌려 같이 놀게 해주었다. 소금 알갱이들이 네모난 무우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노는 소리가 작은 집 부엌 한 구석에 쌓여갔다. 그러나 봄햇살은 놀러오지 않았고 내가 사랑하는 아이는 그 노는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십대란 부모가 관심 가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며,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와 정의를 만들어 간다고 여겨졌다.  

 

고향 집에서 가져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심하게 짜 바다 향이 그 소금기에 짓눌려 응축된 듯한 맛을 가진 갈색빛 액젓과 마트에서 사다놓은 달콤하기만 참치 액젓, 그리고 얼마 전에 사다놓은 희뿌연 새우젓을 적당하게 모아 작은 그릇에 담았다. 그 다음 갈아놓은 생강과 다진 마늘, 이런저런 소금, 잘게 썬 대파, 고추가루,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내 추억, 너무 슬퍼서 이젠 떠올리기도 싫지만, 그래도 그 처절했던 시절의 안타까움만큼, 딱 그만큼만 담아 붉고 진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이제 소금과 한때를 보낸 무우와 어우러질 때다. 절정은 언제나 예상보다 늦거나 빠르다. 마치 우리 사랑이 원하지 않을 때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을 때 종결의 막이 내려지듯, 요리도 그렇다. 그렇게 요리는 실패하고 맛 없는 음식이 만들어진다. 

 

그 결과, 맛이 없으면 참 만들기 어려운 것이 양념장이고 맛이 있으면 정말 만들기 쉬운 것이 양념장이다. 다행히, 어쩌면 아직까지, 그렇게 손 쉽게 무 깍두기가 만들어졌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에게 무우 조각 하나를 선물하고 싶었으나, 아이는 꿈쩍하지 않는다. 십대란 그런 것이다. 부모의 말에 절대 귀기울이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십대를 보냈고, 그렇게 십대를 지나 바로 늙어버렸다. 우리 세대는 이미 늙어 청춘을 시작한 유일하고도 마지막이었던 세대라고 여겼는데, ... 우리들의 아이들도 그럴 것인가.

 

다음 날 퇴근길에는 제주에서 올라온 흙 묻은 감자, 반으로 조각나 겉이 누렇게 변해가던 양배추, 작고 동그란 양파들을 사와 짜장을 만들었다. 나는 최근 들어 부쩍 소리가 심해진 냉장고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맛을 상실해가는 존재를 참 잘 찾아낸다(그렇게 그 때 나를 사랑해줄 각오를 다졌던 이를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텐데). 냉장고 맨 위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자신를 숨기고 길을 잃어버렸음을 드러내지 않던 춘장을 꺼내, 먼 곳으로부터 우리 집까지 놀러 온 돼지고기를 넣어 검고 달콤한 짜장을 만들었다. 요리는 언제 길 잃은 존재들이 만나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비법이다.  그렇게 양파와 양배추는 자주 짜장과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콤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올리고당과 마법스러운 풍미로 모든 요리를 근사하게 만들어준다는 치킨파우더로 짜장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는 늘 그렇게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아이는 짜장에는 관심없다. 나는 검정색 휴대폰을 뺏고 흰 밥 위에 검정색 짜장을 뿌려주었다. 그러자 십대의 아이는 흰 밥을 검게 만들었다. 나는 흰 밥 위에 올려진 짜장을 권했지만, 아이는 그만의 태도로 흰 밥도 검게 만들어 허기진 저녁과 싸웠다.   


내가 왜 음식을, 요리를 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 하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 요리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어쩌다가 보니, 밥을 달라는 것도 귀찮고 부탁하기도 싫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요리는 그냥 해먹는 게 편하다. 며칠 전에는 쯔유로 모밀국수를 해 먹었다. 결국 나는 내 주위에서 귀찮음을 느끼고 싫증을 느끼는 건 아닐까. 그렇게 살아있다는 생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끔 내려가는 고향집 부엌에서 나는 그 곳에 오래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간장이나 기름, 조리용 도구가 내가 최근 몇 년 사이 장만한 것들보다 적다는 걸 알고 내 상황의 심각함, 혹은 진지 모드를 새삼 알게 될 때,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음식을 하고 있는가. 

 

요리를 하게 되자, 이제 부엌은 내 차지가 되었다. 머리 속으로 이번 주말에는 어떤 요리를 해서 먹을까 고민하는 나를, 수십 년 전 나를 알던, 하지만 지금은 연락 닿지 않는 이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그렇게 나는 너무 늦게 알게 되어서 슬픈 것들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술은 늦게 배우고 요리를 빨리 배웠어야 했는데, 반대로 되었다. 헤어짐도 늦게 배우고 만남을 빨리 배웠어야 했는데, 이별부터 먼저 반복적으로 한 탓에 빨리 사랑을 알지 못했다. 

 

요즘 자주 먼 바다까지 보이는 언덕에 작은 식당 하나 차려놓고 예고없이 길 잃은 손님이 오면 술 한 잔과 요리 한 접시를 내놓는 일상을 보내다가, 조용히 살다 가는 꿈을 꾼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그동안 살아왔던 생을 반성하며 후회하며 식당의 좁은 벽에 걸린 낡은 거울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술 한 잔 기울인 다음, 나에게 사랑해줄 구석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살피며, 매일매일 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를 배웅하며 그렇게, 그렇게... 아마 그 때쯤 아이는, 나와 달라서 사랑을 먼저 알고 이별을 늦게 알게 되겠지. 

 

이젠 이루어질 수 있는 꿈만 꾸다가 가고 싶다. 

 

계란노른자로 만든 까르보나라. 꾸덕꾸덕한 이 스파게티는 오래된 지중해 맛이 났다.

 

호주산 생갈비로 만든 갈비탕. 제대로 된 갈비탕 맛을 선물했지만, 집에서는 해선 안 되는 요리 중의 하나였다. 집 안 가득 기름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