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낮술

지하련 2023. 6. 1. 15:35

 

대낮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난다. 그렇게 걷고 나면 쉬이 지친다. 이젠 뭘 해도 지칠 나이가 되었다. 지쳐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단 전제가 있기는 하다. 그렇게 영영 의식이 없어야 한다. 사후 세계라든가 이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생명의 입장에서야 살고자 하는 의지가 크지만, 우주의 입장에서는 생명이란 우연스러운 사소한 사건일 뿐이며, 생과 사는 일종의 반복이며, 등가(等價)다. 내 의식에겐 죽음이며, 사라짐이지만, 우주의 입장에서는 변화란 없다. 어차피 우주 전체적으로는 고정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소주를 마시다 보니, 내 손이 빨라졌고 취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마셨을 뿐이다. 최근 나는 너무 급하게 술을 마시고 순식간에 취하고 그렇게 암흑의 우주를 내달린다. 늘 그래왔지만, 요즘은 그게 잦다.

 

 

아마 나를 오래 알았던 이들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다고 말할텐데. 아직도 이러고 있다. 낮술을 마시며, 곰브리치를 떠올렸다. 그가 어느 대담에선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나온 다음의 거리 풍경이나 가로수의 나뭇잎 색깔이, 전시를 보러 들어갈 때의 색이나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했는데, 나는 낮술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햇살이 밝게 비치는 거리 안에 앉아, 술 한 잔 마셨을 때, 두 잔을 마셨을 때, 세 잔을 마셨을 때, 거리 풍경이며, 가로수의 잎새 색깔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율동이며, 오래된 가게 안 공기의 움직임이 새로워진다고 느꼈다. 아, 이러니, 아직도 나는 술을 마시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