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인생, 예술, 윤혜정

지하련 2023. 9. 28. 14:10

 

인생, 예술

윤혜정(지음), 을유문화사 

 

 

살짝 궁금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거의 가지 못했다. 미술 잡지도 거의 사지 않으며 미술 관계자와 만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 아니 예술은 내 삶의 일부다. 내가 마음의 안식을 얻는 곳은 늘 예술이 있는 장소이거나 공간이다.

 

“미술관은 탐색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많은 진실에 둘러싸인 하나의 진실이다.” - 마르셀 브로타에스(20쪽)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 1924 -1976)는 벨기에의 현대 시인이자 미술가였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나,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뒤늦게 회고전을 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현대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개념미술가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마흔이 되어 미술계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대로 미술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시의 소재로 자주 활용했던 홍합이나 달걀도 미술 작품에서도 등장했다. 

 

Marcel Broodthaers (Belgian, 1924?1976). Pense-B?te (Memory aid). 1964. Books, paper, plaster, and plastic balls on wood base, without base: 11 13/16 × 33 1/4 × 16 15/16 in. (30 × 84.5 × 43 cm). Collection Flemish Community, long-term loan S.M.A.K. @2016 Estate of Marcel Broodthaers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BAM, Brussels

 

흰 캐비넷과 흰 테이블, 1965, @2015 Estate of Marcel BROODTHAERS/Artists Rights Society(ARS),New York/SABAM, Brussels

 

하지만 이 책에는 작품 사진이 많지 않다. 작가마다 딱 하나의 작품 사진이 나올 뿐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어서, 작품 사진을 책에 싣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만 한다. 나 또한 서양미술 관련 책을 낼 때, 저작권료를 알아 보았더니 책을 팔아서 만들 수 있는 기대 이익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금액이 나왔다. 그나마 요즘은 인터넷으로 작품 사진이나 작가의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자인 윤혜정은 현대 미술 관련 일을 하면서 만난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이 책 <<인생, 예술>>을 통해 드러낸다.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의 책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글은 윤혜정의 글보다 더 격하게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서양철학이나 미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서양 미술에 대해서 쓴 책이나 글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나 그/그녀의 작품을 그냥 차가운 대상으로 대하며, 분석의 대상으로, 지식 전달의 수단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두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수준에서만 읽어야지,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예술작품이 왜 우리 곁에 아직도 있는가에 대한 그 신비로움을, 그 감동을 영영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작품을 보고 읽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 그건 감동 때문이다.

 

회화 작품을 보고 울 수도 있구나 하는 보길 원한다면 단연코 마크 로스코Mark Rothko다.

 

사회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모든 ‘계획’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는 “예술가의 사명은 물질 만능주의에 물든 사회적 편견에 대항할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 “예술은 행동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34쪽)

 

Mark Rothko,  <Orange, Red, Yellow>, Acrylic on canvas, 236.2 cm &times; 206.4 cm, 1961

 

그런데 색면추상(Color-field Abstract)이라니. 그러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위기까지 풍기는 평면회화라니. 물질성에 반대해 물질성을 극대화하고 추상화하여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으로 진입하였다고 하면 너무 과한 평가일까. 하지만 마크 로스코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1970년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에서 양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영원한 침묵을 선택했다. (36쪽)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 ~ 1966)에 대한 영화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동시에 자코메티는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반성도 함께 했다. 2017년도 작품인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Final Portrait>는 국내에도 소개되었으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프로젝트 중이었나. 그랬다면 매일 야근 중이었을 것이다. 장 주네Jean Genet는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는다.

 

“대상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혼자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 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될 수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 (80쪽)

 

이 책에는 많은 현대예술가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 내가 알고 있는 예술가여서 다소 놀라웠다. 결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예술가들은 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경험 중의 하나는 독일의 어느 아트페어에서 오픈 첫 날 내가 팔린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작품이 실제로 팔렸던 것이다. 거의 이십년 전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이 때의 경험으로 미술계에서 나름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지만, 그건 어느 정도 안목을 갖추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은 작품은 누가 봐도 좋은 작품이다.

 

안리 살라 Anri Sala(1974 ~ )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녀의 <붉은 색 없는 1395일 1395 Days Without Red>(2011)라는 비디오 작품은 상당히 흥미롭다.

 

Excerpt: Šejla Kamerić, 1395 Days Without Red from Artangel on Vimeo.

 

전체 44분 정도의 길이를 가진 이 비디오 작품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사라예보 주민들에게 내려진 명령, 저격수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밝은 색의 옷을 입지 않고 거리를 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옮기고 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말하기도 어려운데, 안리 살라는 은유적으로 그 참혹스러움, 그 전쟁의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사상적 노마드’를 자처하는 안리 살라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인물들의 몸짓과 호흡, 그리고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 “공감각적인 조형 언어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172쪽)

 

유영국(Yoo Youngkuk, 1916~2002) 〈작업(Work)〉, 1969 Oil on canvas, 136 x 136 cm Courtesy of Yoo Youngkuk Art Foundation,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유영국 (1916-2002)의 작품은 실제로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일까, 그냥 지나쳤던 것같다. 마치 김환기의 작품을 보면서 '아 좋다'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환기미술관에 가지 않은 지도 한참 되었다. 대학 시절, 잠시 환기미술관 바로 옆에서 살기도 했는데 말이다.

 

Ghada Amer (Egyptian, born 1963), Portrait of Maya,  Works on paper, Watercolor and embroidery on paper, 59.7 x 39.4 cm, 2020

 

가다 아메르(Ghada Amer, 1963 ~ )의 <<마야의 초상 Portrait of Maya>>(2020)도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흥미롭게도 아메르식 각성은 철저히 역설법을 따른다. 그녀는 여성을 둘러싼 자유, 성 정체성, 인권, 사랑 등의 문제를 꾸준히 다뤄왔으나 잔 다르크 대신 그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온 문제적 여성들을 내세운다. 이 여성들은 에로틱함을 넘어 꽤 대담하고 노골적이며 도발적이다.(255쪽)

 

대대로 루이즈 부르주아, 쿠사마 야요이, 로니 혼, 아네드 메사제, 미리엄 샤피로, 김수자 등 많은 여성 작가가 단순한 노동으로 취급받는 바느질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바느질이 자기 치유에 가깝고, 김수자의 바느질이 인간 본질에 대한 성찰이며, 쿠사마 야요이의 바느질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면, 아메르의 바느질은 남성적 회화 영역을 ‘침범’한 투사의 고요한 실천으로 읽힌다. (258쪽)

 

Ghada Amer: My Nympheas #2, 2018, acrylic, embroidery, and gel medium on canvas, 64 by 72 inches; at the Centre de Cr?ation Contemporaine Olivier Debre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대표적인 쇼아Shoah 작가다. 쇼아란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다. (368쪽)

 

왜 나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전시가 부산에 열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것일까. 우습게도 볼탕스키의 부고 기사를 해외 아트 저널을 통해 바로 확인했는데 말이다. 이십대 후반, 나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좋아하는 한 여대생을 한창 쫓아다닌 탓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도록을 어렵게 구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이젠 중년이 되었을 그녀도 그 부산 전시를 보았을까. 감독이자 사진작가인 알랭 플레셰르Alain Fleischer가 수십년동안 볼탕스키를 쫒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만나다 J’ai retrouve’ Christian B.>(2020)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관에서 1950년대나 혹은 더 오래된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보면, 항상 저 사람은 어떻게 죽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침대에서 죽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말이죠. 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죽음에 대해 질문합니다. 저는 영화관에 갈 때마다 그 생각을 하죠. … 전쟁 당시 사망자가 400명이라는 점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단순히 말해 사망자 400명이 아니라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그 사람, 축구에 열광하는 그 사람 등 고유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재하는 거죠.”(369쪽)

 

볼탕스키의 작품을 실제로 언제 처음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 깊이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상당히 무거웠던 것이 생각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의 작품을 다시 떠올리고 보니, 현재 유럽 사람들을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슬픈 분위기는 어쩌면서 세계 2차 대전 이후 이어지는 어떤 분위기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기구조주의 같은 현대 사상의 흐름 또한 20세기 초 유럽을 절망으로 내몰았던 전쟁을 수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반성의 일환이었으나, 그 반성 속에서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이성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Christian Boltanski, Lyc?e Chases, 1987, 15 tin boxes, 15 photographs, 15 black lamps, electric wire, 297.2 x 266.7 x 30.5 cm

 

Christian Boltanski, Monuments (Installation Salle Petriere), 1986



“사진이 죽음 그리고 과거와 연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진을 찍고 3분이 지나면 피사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간직할 때마다 그것을 죽게 하는 꼴이 되어 버리지요. 마치 오브제를 박물관의 진열장 안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오브제의 이미지일 뿐 더 이상 오브제가 아닌 것이지요.” 그의 말대로 사진은 보전하는 동시에 소멸시키고, 따라서 무언가를 보전한다는 행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기시켜 부재의 의미를 더 강조한다. (370쪽)

 

“우리는 두 번 죽는다. 죽을 때 한 번, 당신의 사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때 또 한 번.” (371쪽)

 

윤혜정의 <<인생, 예술>>은 일반 독자들에겐 생소할 지 모르는 현대 미술가에 대한 소개서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자주 국내 전시가 열리는 이들이기도 하다. 또한 몇몇 작가들은 현재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국제갤러리에서 자주 소개된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자주 보기 위해 갤러리를 가지는게 한 때 꿈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거창한 꿈이었다.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알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이 책은 유용한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