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눈 내린 도서관에서의 빡침 - 공적 공간의 사적 점유

지하련 2023. 12. 17. 14:50

 

 

책들이 고요하게 숨을 쉬는 서가 사이로, 눈 내리는 창 밖 풍경을 보러 집 근처 도서관에 왔지만, 아, 나는 스트레스로 터질 것만 같다. 내 옆에 앉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 그리고 이 행동을 무려 한 시간 이상 반복을 하다가 나갔다. 심지어 커피를 가지고 간 사이 내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책가방을 올려놓는 대범함까지 보여주었다. 그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집어던질 뻔했다. 그 화를 참는데 약 삼십분 정도 걸렸다.

 

앞 좌석에 앉은 한 여성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앉더니,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충전기와 그것에 연결된 핸드폰만 있을 뿐이다.  한 시간째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한 자세로 보는 것이 불편했는지, 책상에 엎드리기도 하고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켜기도 하며, 몇 시간 동안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았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책을 읽으러 온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나갔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왜 도서관에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도서관에 오는 목적은 다들 다를 수 있다. 어쩌면 그들에겐 도서관은 잠시 시간을 보내거나 쉬거나 노는 장소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니, 도리어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왜 나는 나와 다른 생각과 태도를 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인가. 

 

도서관을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이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생각한다. 약속장소로 잡을 수도 있고 와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건 도서관의 열람실이 아니라 다른 곳이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만, ... 글쎄다. 개인의 생각, 주장, 참견과 도서관 운영 시스템은 엄연히 분리되어야 하며, 그 분리의 경계가 모호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아이들을 만나면, 나이 든 사람들은 개입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의 사법 시스템이 정해놓은 바대로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사법 시스템은 사전적이기보다는 사후적인 제도다. 일이 터지고 난 다음 대응하며, 반복되는 대응들을 바탕으로 제도를 정교화한다. 하지만 제도가 발전하고 정교해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더 빨리, 더 복잡하게 변해간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개입과 국가/제도/시스템의 운영 사이는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인가.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개입은 줄어들고 국가/제도/시스템의 운영은 전방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제도/시스템에 온전히 나를, 가족을, 우리를 맡길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그냥 사소한 것들-작지만 매우 기본적인 행동이나 태도-에 화를 내고도 말하지, 행동하지 못하는, 빡친 개인들만 넘쳐 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그리고 온라인은 그런 사람들의 감정 토로의 장이 된지 오래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분노하는 개인들 중 한 명이 나라는 사실에, 한심스러워 보인다.

 

어떻게든 이 번잡스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아...

 

하지만 눈은 곱게 내려 도서관 카페 테라스에 쌓이고 저 멀리 구름은 느리게 느리게 동북 방향으로 흘러갔다. 

 

 

덧붙이는 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는 근대의 산물이다. 탈근대에서는 공적 영역이 무너지고 사적 영역이 강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는 이러한 예상을 부정적인 시선을 쳐다보았는데, 이유는 사적 영역의 강화가 사회 문제를 일으킬 것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는 '윤리학의 시대'가 될 것으로 여겼다.

 

딱히 윤리학의 시대가 되는 것 같지 않고 도리어 경찰국가, 검찰국가 비슷해지는 모양새다. 개인들에게 윤리의 문제를 가르치지도 묻지도 않고 국가 시스템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실은 사적 영역의 강화는 1인 가족의 강화나 가족 이기주의가 되었다. 내 아이만 소중하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생겨나고 문제를 일으키며, 아이들 간의 사소한 다툼도 학교 폭력이 되고 내가 중요하고 옳으니, 친구나 타인에게 가하는 무형, 유형의 폭력에 대한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탈근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바 사적 영역의 강화는 공적 영역에 억눌려왔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과 다양한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차별과 편견들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일상을 보내게 된 개인들의 폭력, 일탈, 무분별한 소비를 통한 자기 만족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무분별한 소비를 통한 자기 만족(빚을 내어 소비하는 행동들)마저도 없다면 더 비극적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점은 더 끔찍하다. 그것마저도 없다는 정말 그들은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사적 영역의 강화가 진행되었던 로마 후기의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유사하다. 그 결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들은 전투에서 싸울 의지도 잃어버린 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주하고 그 많은 영토를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평안을 추구하고자 하였다(이런 측면에서도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테마는 상당히 시의적절했다). 

 

도서관은 공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 곳을 사적 장소/공간으로 여긴다면 위에 내가 비난했던 행동들은 다 용인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시공간은 사적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는 디지털 공간도 마찬가지다. 사적 공간이 집중되어 있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우리는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며 변화시키고 있다. 

 

공적 영역의 회복을 이야기했던 하버마스는 뒷전으로 보내며 무수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책들을 소개하고 전파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바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탈근대주의자들의 책과 이론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실은 이렇게 말하는 내가 혼자였다는 사실에, 내가 잘못되었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내가 너무 진지했던 탓이다. 그들은 이런 진지한 결과나 뒤 이어진 불햄한 결과 같은 것엔 관심없고 새로운 학자와 책, 이론을 소개하면서 주목받고 싶었을 뿐인데).

 

그냥 적어도 인문학을 전공한다면 좀 진지해졌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외국 학자들의 책이나 이론 같은 인용하면서 잘난척 하지 말고.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래서 어떤 귀결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좀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아, 또 분노하는 나와 마주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