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만프레드 프랑크, <<현대의 조건>> 읽기 1

지하련 2024. 1. 29. 00:03

 

독일어 책 표지. 영역본은 없는 듯.

 

1. 

2002년에 한글로 번역 출간된 만프레드 프랑크(Manfred Frank, 1945 ~ )의 <<현대의 조건 Conditio Moderna>>(최신한 옮김, 책세상)을 읽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이 책을 구해 몇 번 읽으려고 도전했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다시 시도했는데, 어,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이해가 된다. 너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대로 다시 현대/근대에 대한 정리를 할 겸, 책을 읽어 가면서 블로그에 요약, 또는 정리를 해서 공유하려고 한다. 

 

2. 

튀빙겐 대학 교수로 소개되는 만프레드 프랑크는 문예 이론과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서인 <<Unendliche Annaherung>>(무한한 접근)은 전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서적으로 인정 받을 정도다(이건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2000년대 전후로 몇 권의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나,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읽히지 않았다. 읽히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장은 딱딱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프랑스어권 철학책(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동일하나, 상당히 문학적이라 읽고 이해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독일어권 철학책은 딱딱하고 재미없다. 반대로 제대로 읽으면 프랑스어권 철학책보다 보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인문학적 유행과 다소 거리가 있었고 그 정도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었다.

 

그런 이유로 근대 합리성, 또는 기계론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 후기 근대주의자들 책보다 먼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소개된 대부분의 책들은 이러한 배경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않고(국내 저자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진 프랑스 학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바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역사적 배경이나 맥락 없이 유행처럼 인문학 공부를 했던 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고 보니 어느 정도 지식이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플라톤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이야기하게 된다. 근대성의 비판 같은 건 이젠 의미 없다. 그것이 삶 속에서 일상 속에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래서 무엇을 개선하고 실천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해야지,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 게 뭐 중요하다고.   

 

만프레드 프랑크 Manfred Frank




3.
인문학 서적은 어렵다. 인문학 공부는 어렵다. 대학 다닐 땐, 어려운 철학책을 번역할 정도가 되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번역 역량과 인문학 역량은 딱히 비례하지 않는다. 번역은 어느 정도 기계적인 측면이 있어서 뛰어난 번역가라면 문장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도, 전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엉뚱한 번역을 하진 않는다. 

 

제대로 인문학, 특히 서양 철학을 공부하려면 수학(기하학) 실력도 상당해야 한다. 동양철학을 제대로 하려면 한자 공부부터 하듯이 서양철학을 하려면 수학 공부부터 해야 된다고 할까. 그런데 대학 안에선 수학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철학 전공은 아니었으나, 철학을 공부하는 누구도 수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수학과 철학, 예술이 어떻게 연관관계를 맺으며 변해왔는가를 배우게 되었으니. 

 

가령 십진법은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을까? 놀라지 마라. 채 몇 백년이 되지 않았다. 특히 서양 존재론적 전통 안에서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에 따라, '0'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자연 안에 없음(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 되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십진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타고라스는 '두 직각변에 얹힌 두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은 빗변에 얹힌 정사각형의 넓이와 같음'을 증명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 

 

여튼 인문학 공부는 어렵다. 뭐든 제대로 하려면 어렵지만,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면 그 책을 의심해라.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중 서적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인문학 책이 아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뿌듯한 마음으로 철학이란 이런 거구나, 아, 플라톤은 이랬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고, 칸트, 헤겔, 최근의 데리나나 푸코, 들뢰즈는 하는 이야기는 버려라. 어렵더라도 제대로 된 철학사나 지성사 책을 읽어라.(그냥 철학사나 지성사 읽기 모임을 할까)

 

4. 
하지만 나도 공부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현대의 조건>>을 뒤늦게 읽으면서 각 챕터별로 요약하고 정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책을 사 놓고 몇 번 읽으려고 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 읽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어, 진도가 나갔다. 그런 김에 이해한 대로 정리해서 올리면 나중에 찾아 보기도 쉽고 이해도 좀 더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5. 니체에게 있어서 '신의 죽음'
사회적 정당성의 창조자이며 의무 부여자인 ‘형이상학’에 대한 신뢰 상실을 표현. 이 때 형이상학은 ‘초감각적 세계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뜻함. (8쪽)

 

초감각적 세계란 감각 너머의 세계이니, 추상적 세계를 뜻한다. 추상적 세계는 다른 말로 하자면 수학적 세계인 셈이다. 이 세계 속에서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논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며, 이러한 형이상학으로 만들어진 어떤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부정을 뜻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넘어 우리 문명이 기대고 있는 초감각적 체계에 대한 신뢰 상실이다.

 

초감각적 체계, 즉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이며, 기하학의 세계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선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지만, 그것을 우리는 알지 못할 뿐이다. 신학의 체계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으니, 결국 니체는 이러한 서구 형이상학적 체계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죽음을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6.
그리스 비극의 연출 같은 경우 폴리스 전체에 대한 구속력 있는 신화의 질서를 고도의 예술적 차원에서 제의의 방식으로 제시 (8쪽) 

그리스 비극도 형이상학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신화의 질서’라고 말하며,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새로운 신화학’이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만프레드 프랑크의 장점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가를 이야기한다.

 

7.
‘형이상학 종언에 대한 용인’에 대한 2가지 입장
-현대 프랑스어권: 담론은 합리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투쟁적’으로 결정된다.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로 결국 상징적으로 매개된 모든 상호작용에서 작동되는 권력관계의 위선적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어권, 영어권: 정당성과 관련되지 않은 논증은 규칙에 따라 폐기될 수 있고 보편적 확신을 지향하는 것만을 이성적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타당한 것에 관한 토론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초월의 배경으로부터 토론의 진리나 옮음을 보증해주는 확실한 선험적 토대 위에 서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토론에 나서야 하는 것. (8쪽 ~ 9쪽)

 

만프레드 프랑크도 독일어권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프랑스어권 학자들이 투쟁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권력관계의 위선적 가장'라는 해석에서 나는 푸코를 떠올렸다. 데리다도 해체를 이야기하고 난 다음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상당히 실존주의적이라 여겼다. 결국 존재하는 나 대신 지금 살아있는 나, 행동하는 나를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반대로 하버마스 같은 이들에게선 존재하는 나가 존재하던 나가 되었으나, 존재 없이 살기 어려우니 다시 그것을 찾기 위해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느낌 정도. 

 

나는 철학 전공도 아니고 지금 공부를 하는 사람도 아니니, 이러한 식의 해석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뭔가 정리하다 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이상 서문에 대한 내용이다. 천천히 읽고 있지만, 몇 달은 넘기지 않을 듯 싶다. 서양미술사도 이런 식으로 정리하다가 말았는데. 올해도 할 일이 태산같은 한 해가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