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그러나 절망으로부터,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지하련 2024. 3. 2. 20:19

 

그러나 절망으로부터,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던 위안의 기록들
On Consolation: Finding Solace In Dark Times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Grant Ignatieff(지음), 김한영(옮김), 까치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그리고 며칠 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집중해 읽었다. 특히 세네카, 사도 바울로,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 챕터는 인상적이었다. 특히 아우렐레우스의 삶은 황제의 삶이라고 하기엔 무색할 정도였다. 그는 황제를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학자를 원했던 것일가. 그리고 전쟁터에서 남긴 그의 단상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까지 남아 위로가 되고 있다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전쟁터에서 그는 삶의 무상함, 허망함을 이야기하지만, 먼 훗날의 우리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위안을 얻고 있으니, 그의 삶은 정말 허무했던 것일까. 

 

저자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책이나 글을 남긴 이들의 더듬으며 그들의 흔적을 뒤따라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 하나 상당히 감동적이어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을 밝히고 견딜 만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 … 그러나 어떤 날에는 …. 그들 대다수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 … 우리가 사랑 또는 우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우연한 지 상상하게 된다. 그럴 때 세계는 암흑 속에 빠지고, 우리는 인간의 다정함 덕분에 잠시 피했던 맹추위 속으로 되돌아간다.” 까뮈, <<페스트>> 중에서 (306쪽)

 

이런 문장이 있었나. 어쩌면 <<페스트>>를 읽는 동안, 그 소설 위를 짙게 드리운 무겁고 어두운 우울의 그림자가 나는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19세기가 만들고 바꾸어 놓았던 것들의 어두운 절망과 고통이 한 번에 밀어닥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실존주의는 싹튼 것일 테니. 그러나 두 세계 전쟁을 거치는 와중에서도, 그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생명을 꺼지지 않았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바울로 (56쪽)

 

바울로의 서신들은 지금 읽어도 놀라운 평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아!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특히 한국 기독교는 내가 볼 때 전혀 그리스도교라고 믿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 바울로, <갈리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54쪽)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위로 - 키케로와 세네카,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토스의 위로 - 역시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층을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바울로는 임박한 메시아의 재림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로는 인간의 평등을 말하는 언,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렬한 위로의 언어를 최초로 창조했다. 거의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언어는 이후에 평등을 외치며 등장한 세속적, 혁명적,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적 언어의 기초가 되었다. (55쪽)

 

결국 카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바울로의 언어 속에서 그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신앙, 그의 믿음, 그의 메시지가 그 당시 사람들을 울렸고 신앙을 가지게 하였으며 그것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  바울로 (66쪽)

 

바울로는 사도로서 비유대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깊이 낙담한 것은 “나는 내 동족 유대인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구하는” 데 실패한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라는 구절은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낙담했는지를 시사한다. (63쪽)

 

바울로가 그렇게 노력했던 그 신앙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아니 그 때와 비교해 지금 더 나아진 건 과연 있을까. 그 때도 폐쇄적이었던 유태인들은 지금도 폐쇄적이며 차별적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자신들을 향한 것이지, 타민족을 위해 개방된 것이 아니다. 중세 이후로 이어진 유태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불러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저 때 바울로의 노력이 통해 유태인들이 개종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다가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한 두 번쯤은 위기와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우리보다 어려웠던 이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위로와 위안에 대해 적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위안의 메시지를 던진 이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내었다. 아마 다들 한 두 번씩은 들어본 이들이 소개되며, 이들의 책들에서 글들을 인용하며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느꼈던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여 일반적인 개론의 형태를 띄지 않고 살짝 수필집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기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편하게 읽어나가며 어느 지점에서는 살짝 감정적으로 흔들리기도 한다.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전성기 로마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황제가 된 이후 전쟁터에서 살았던 불운한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한때 위로는 철학의 주제였다. 철학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지 일러주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의 스토아 철학에서 위안Consolatio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 분야였다. (19쪽)

 

위로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의 행위이다. 우리는 유족의 곁을 지키고, 친구 옆에서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도록 돕는다. 위로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의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는 망자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그들이 남긴 말을 되새기면서 의미를 도출한다. (22쪽)

 

편안함은 일시적이고, 위로는 지속적이다. 편안함은 물리적이고 위로는 명제에 가깝다. (24쪽)

 

위안은 철학의 한 분야였다고 하지만, 그건 헬레니즘 시대, 혹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철학에 해당될 것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스토아철학에 대한 비판에 익숙했던 나에게 스토아철학은 일종의 처세 철학처럼 읽혀지고 받아들여졌다. 고전 그리스를 지나 헬레니즘기의 로마로 오면, 플라톤 철학들은 주변부로 밀리고 수사학을 중심으로 한 스토아철학이 주류가 된다. 그런데 나는 왜 로마 사람들이 스토아철학을 찾게 되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세네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거대한 로마 제국에서 일어나던 무수한 사건들, 그리고 국경 변방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던 그 시기를 지탱하기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던 사상적 체계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스토아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심지어 아우렐레우스는 황제가 된 다음 죽을 때까지 전쟁터에서 살았다. 과연 그는 황제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일까. 심지어 그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정을 통한 로마의 장군과 함께 반란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었을 정도이니, 아우렐레우스에게 황제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 필멸의 삶은 지상의 작은 땅 조각에서 일어난 하찮은 일이며, 훗날의 명성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그 역시 하찮은 것이다. 그 명성은 빠르게 소멸하는 하찮은 인간들의 연속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이 오래 전에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을 알 리는 더욱 만무하다.” - 아우렐리우스

 

그가 전쟁터에서 병들어 죽은 지 이 천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글을 읽을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상상했을까? 그리고 전장에서 나이가 들어 죽음을 향해 가던 그가 지키고자 했던 아들 콤모두스가 큰 누이 루킬라가 저지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로마 제국 최악의 폭군으로 역상에 남았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까지 로마는 꽤 안정적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천천히 무너져간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시련기가 왔을 때, 사람들은 종교 경전을 읽는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아마 <욥기>를 집중적으로 읽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욥기>를 읽을 때 드는 기분은 미묘하다. 과연 욥이 이렇게까지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고난을 받으면 욥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

 

이 신은 전능하지만 한 편으로는 유혹과 간사한 말에 쉽게 흔들리는 인간적인 신이다. (29쪽)

 

<욥기>의 신은 구약성서의 신이다. 신약성서의 신이 상당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자면, 구약의 신은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기원전부터 내려오던 신화와 전설을 모은 책이니, 그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성직자로 인해 곡해되고 잘못 전파된 신앙은 어찌하면 좋을련가. (이건 모든 종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욥기>가 우리기에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고통인 순간, 위로가 아예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슬픔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고통을 견딜 줄 알아야 하고, 살아온 삶의 진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에게 이 고통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거짓 위로를 거부해야 한다. 죄책감을 거부하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침묵을, 의미없음을 운명으로 부여하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은 운명과 맞닥뜨리며 끝없이 고통 받는 인간의 상황, 그 회오리 바람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누더기를 걸치고 하늘을 향해서 감히 주먹을 들어 올리던 자와 같이 용기를 내야 한다. (37쪽)

 

이 책에는 많은 이들을 나오지만, 이 글에서 모두 소개하긴 어려울 듯 싶다. 안나 아흐마토바가 등장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여류 시인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정말 매력적인 책임에 분명하다. 아래는 이 책에 소개된 아흐마토바의 <<레퀴엠 Rekviem>>의 일부이다.

 

고요한 돈 강이 고요히 흐르고
노란 달이 나의 집으로 들어오네.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들어와
그림자를 만나네, 노란 달
이 여자는 건강하지 않아,
이 여자는 완전히 혼자야.
남편은 무덤에, 아들은 감옥에 있어요.
부디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288쪽)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알진 못하겠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기독교를 탄압했다. 확실히 기독교 신앙은 로마스럽지 않았다. 그 당시 유일신 신앙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어쩌면 초기 기독교에서의 이단 논쟁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리우스주의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신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 아리우스파에게 예수는 지상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었다. (116쪽)

 

저자는 보에티우스를 이야기하며 로마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의 철학과 신앙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언급한다.

 

보에티우스가 이해하기에 그리스 철학은 인간은 아난케Ananke, 즉 운명과 조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121쪽)

 

“희망은 신에게 헛되이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는 헛되이 끝나지 않는다. 기도가 올바른 것이라면 효과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덕을 멀리하고 미덕을 함양하라. 올바른 희망을 향해서 정신을 고양하고, 높은 곳을 향해 겸허히 기도를 올려라. 스스로에게 정직하다면, 위대한 필연성,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는 심판자의 눈 아래에 살기 때문이다.” - 보에티우스 (124쪽)

 

“인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신의 마음을 묵상할 때 더 자유롭고, 물질의 세계로 내려갈 때에는 덜 자유로우며, 지상의 육신에 갇힐 때에는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 - 보에티우스, (127쪽) 

 

중세를 지나 근대로 오면 유쾌하고 사교적인 지혜를 이야기하는 몽테뉴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수상록>>은 번역되어있으니,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근대인의 사소하지만 적절하게 교훈적인 위안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가장 아름다운 삶은 인간의 평범한 양식에 순응하고 순리에 따르는 삶이다. 이제는 노년을 좀더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건강과 지혜의 수호자인 신께 노년을 맡기되, 유쾌하고 사교적인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 몽테뉴 (161쪽)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데이비드 흄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1734년부터 1738년까지 썼고, 이 책을 완성했을 때 그가 26세였음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젊은 시절 이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그 전까지 거의 금기시되었던 어떤 태도)를 정하곤 이후엔 그냥 열심히 살았다고 할까. 18세기 초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마르크스는 이상적 사회주의 대신에 역사철학에 근거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204쪽)

 

“인간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사유재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의 자유를 얻었다.” - 마르크스 (207쪽)

 

마르크스의 생애를 아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지만, 마르크스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금서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냉전 속에서 마르크스는 금기어였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이들이 제대로 마르크스를 알지 못했고 한국 군사 정부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오해되어 수입되었다. 이 때 이렇게 배운 이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왜 고통을 받는가?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농담일 뿐인가?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답해야만 하네.” - 말러 (246쪽)

 

1988년, 노년에 받은 전립선 수술과 노모, 장모를 모두 돌보아야 하는 부담으로 지치고 우울감에 빠진 레비는 거의 평생을 살아온 토리노 소재 아파트의 내부 계단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303쪽) 


“세상의 악은 늘 무지에서 비롯되며, 무지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 까뮈, <<페스트>> (326쪽)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은총 밖에서 살아간다. 은총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몰두하여 기독교가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야만 한다. 바로 저주 받은 자들을 살피는 것이다.” -  까뮈, <<나의 직업의 의미>>

 

“나와 깨어 있어라.”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잠들었고, 그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라고 명한 신의 진리를 예수 홀로 직면해야 했다. (359쪽)

 

책 끝에 역자후기가 실려있는데, 그는 이 책에 후반에 등장하는 이들에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나는 로마 시대 사람들로 집중되었는데. 실은 이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이미 절판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평전을 구입했다. 두껍고 어려운 인문학 책을 구입하면서 나는 이 책을 왜 사서 읽는 걸까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앞으로 벌어질 비즈니스 전쟁에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가 담긴 책들인데 말이다.

 

이 책의 저자도 흥미롭다. 캐나다 자유당 당수까지 했던 이로 조부시절 러시아에서 망명한 러시아계 이민자 집안이었다. 역사학 전공으로 인권 운동을 하였으며 현실 정치에도 몸 담기도 하였다. 여러 권의 책을 내기도 했고 소설까지 낸 바 있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다.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그 재미만큼 위안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