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하련 2006. 6. 11. 10: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에프라임 키숀(지음), 반성완(옮김), 디자인하우스, 199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적인) 작품 앞에서 절망감을 느꼈을까. 혹은 그 절망감을 뒤로 숨기고 열광적인 반응, 자신의 영혼 가닥가닥이 ‘텅 빈 캔버스’ 앞에서 전율했다는 식의 거짓된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 모두는 정말 이랬던 적이 없었는가 한 번 돌이켜볼 일이다.

하지만 키숀의 ‘반-추상주의’를 이해하면서도 나의 ‘추상주의’를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브 클라인의 푸른 색은 언제나 날 즐겁게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숀의 견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의 견해는 매우 옳고 정확하다. 심지어 그가 요셉 보이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나 또한 많은 현대 미술에 대한 비평문들을 읽어왔지만, 그런 비평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이 더욱더 어려워졌다. 반대로 비평문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던져놓았을 때, 현대 미술이 쉬워졌다. 난해한 현대의 이론들은 꼭 고대의 암호문처럼 나에게 어렵고 아무런 호소력도 가지지 못했다.

키숀의 의견처럼 많은 현대 미술에 대한 비평문들은 형편없다. 하지만 키숀의 생각대로 현대 미술이 나에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대예술가들은 나에게 무수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키숀은 왜 이렇게 흥분하고 비난해대는 것일까. 그가 보기에 허위에 빠진 이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도대체 그림을 전혀 그리지도 않은 이들이 대단한 작품인 양 인정하고 이를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구입하는 정부 기관들, 공익 재단들, 그리고 개인 콜렉터들, 그리고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는 듯이 지껄여대는 비평가들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브 클라인의 푸른 색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나도 만들 수 있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만들 수 있다. 아무나 이브 클라인처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렘브란트처럼 자화상을, 그리고 누가 미켈란젤로처럼 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을까? 누가 티치아노의 그 색깔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느 것이 위대한 예술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모호해지고 불투명해지고 있다. 예술은 대중과 유리되고 예술가, 비평가, 소수의 콜렉터들을 위한 예술로 변질되고 있다. 하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뒤샹이 변기를 전시했을 때에는 아무나 미술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시도하고 있는 행동주의는 뒤샹의 동어반복은 아닐까. 도리어 우리 모두가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고전 시대의 그 고리타분한 구분을 우리 스스로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의 저자 키숀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긴 그가 공격한 예술마피아들도 또한 그러고 있으니.

지금 당장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들 모두가 예술가임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만큼 불행한 시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