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하련 1999. 2. 5. 20:46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10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고진의 책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해설의 여기저기에 고진의 단어들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어들이 겐이치로의 소설을 말하는데 적당한가에 대해선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미친 놈이 이상한 소설 하나를 썼군’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웃었다면 이 소설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소설에게서 기대되어지는 것들-탁월한 문장력과 감동이나 교훈-은 이 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스로 쓰레기가 되기를 자처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으로 키취화하려는 태도’로써 정반대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과연 오늘날의 야구가 과연 ‘우아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의 소설들에 대해서까지도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따위의 의문을 품게 만든다.

굳이 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메타픽션’쯤에 갖다 놓을 수 있는데, 왜냐면 이 소설은 소설쓰기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의도적으로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를 야구와 연관시키며, 그리고 소설 속의 모든 인물과 소재들은 야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그 향해간 장소엔 야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소설 속 시점(時點)에서도 야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오며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추구하는 야구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와는 다른 야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의도가 드러난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게 하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또한 소설은 어떤 유기적인 구조나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 형태의 야구의 부재와도 연관된다.

4.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묻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야구에 대한 가지고 있는 태도들이 모여 분명 존재하지 않는 야구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야구(에 대한 태도)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에서 어떤 태도로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허무나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무언가를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