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아직까지 좌익 활동이 문제가 되는지 알 턱 없다. 지금이 60년대, 70년대 냉전 시대도 아니고, 좌익 활동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다. 이젠 서울대에서마저 정치경제학 강의가 없어지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가 없다는 것이 기사화되며, 학문 연구나 교육의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나 점점 수가 줄어들어가는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위축될까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굳이 나서서 좌익 활동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제식민지 시대의 좌익활동은 독립 운동과 연계되어 있었으니,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한국 정부는 이 과거마저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손을 잡고 내일을 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강해졌다.
심지어 이젠 우리가 익히 아는 바 냉전 시대의 공산 국가는 없다. 심지어 아직도 공산당이 있는 중국이나 베트남, 또한 사회주의 총본산 비슷했던 러시아마저도 권위주의적 정권으로 이해한다. 이미 경제 시스템은 상당히 자본주의화되었다. 또한 북한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은 공산 국가가 아니라 그냥 독재국가다. 공산주의라든가 사회주의라든가 하는 건 이미 잊혀지고 있는 과거 문제다. 그런데 이걸 끄집어 내어 문제를 일으킨다. 참 알 수 없는 정부이며, 정권이다.
2.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내가 그동안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자유주의의 여러 스펙트럼이 있듯이 사회주의도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어쩌다가 나는 마르크스-엥겔스만 떠올리게 된 것인가. 그러다 보니, 나도 편협해진 것이다. 존 듀이는 자유주의를 두 개로 나눈다. 자유방임의 자유주의와 국가개입의 자유주의. 여기에서 국가 개입이 심해지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더 나아가면 사회주의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일까? 그동안 뭔가 잘못 배웠거나 한 쪽으로 치우친 채 공부했다는 생각을 했다. 서구 여러 나라에 아직까지 사회당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살아있었던 그 당시, 사회주의적 이상을 따랐던 이들이 만든 그 정치적 결사체의 전통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정당인 셈이다.
3. 정치적 결사의 자유, 정교분리라든가 언론 자유, 참정권의 확대 등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을 매혹시켰던 주제들이었다. 그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세기는 매우 어수선한 시기를 거친다. 이 때 한 때 프랑스를 이끌었던 나폴레옹 3세는 우리가 잘 아는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국민들의 투표(그 땐 참정권을 가진 이들이 제한적이긴 했지만)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독재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정치적으로는 반-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였으나, 노동자 서민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을 만들었다. 즉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정치적 탄압을 이어나갔지만, 일반 서민들을 위해서는 빈곤층 무료 급식, 주말 작업 금지 등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치 체제를 <카이사르주의>라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형태를 띄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서민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펴는 형태를 뜻한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부도 여기에 속한다. 후대의 학자들이 비스마르크 정부를 두고 한탄한 것이 여기에 있다.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국민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주는 대로 받는 수동적인 국민들을 만들었다고(어쩌면 여기에서부터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연유한 것일지도).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 몰락하지만,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독일을 근대 산업 국가로 만든 뛰어난 리더라고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만 알고 둘은 가르쳐주지 않은 것인데. 근대 자유주의자들은 참정권의 확대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일반 국민들이 투표를 했더니, 결과는 독재 정권의 부활이었기 때문이었다. 투표를 통한 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풍경이 이해되는가? 아마 지금은 이해되겠지. 그렇게 히틀러의 독일도 그렇게 등장했으니까. 지금 한국 정부는 또한 어떠한가. 하긴 박정희도 그렇게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9세기말 자유주의자들이 그제서야 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 예전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좀 회의적으로 변했다. 박근혜 때는 그럴 수 있겠다고 여겼지만, 이번에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의적으로 변한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야당인 민주당 정권에서 성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 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낙후된 이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모르는 국민들로 인해서 말이다.
4. 미국 대선은 한 국가의 대선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세계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 내부도 엉망인데, 다른 나라 신경은 이제 끄라는 게 미국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의원의 연설을 보았다. 과격하다. 아마 한국에서 어느 젊은 여성 의원이 단상에 올라와 저렇게 연설했다면, 나이든 한국 노인네들은 빨갱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내가 앞에서 다양한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언론에서는 대기업이나 은행의 구조조정만 말하고 폐업하는 중소기업들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중소기업들의 오르지 않는 연봉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고 대기업이나 은행, 빅테크 기업의 높은 연봉만 말하는 것일까. 왜 90% 이상의 국민들에겐 해당사항 없는 종부세나 금투세만 말하고 월급에서 야금야금 떼어가는 세금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왜 국민들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걸까? 여러 모로 황당하고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서 사는 젊은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솔직히 지금 한국은 정점을 찍었고 이제 내려갈 일 밖에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지금 젊은 세대들이 나서야 한다. 저런 강력한 주장을 하며,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유튜브에서 'AOC'로 검색하면 많은 동영상이 나오니,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이렇게 주장을 해도 변할까 말까다. 그만큼 한 나라, 한 사회의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민주적 절차를 지켜가며 변화시키는 건 더욱더. 그러니 우리들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