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창녀, 넬리 아르캉

지하련 2005. 11. 3. 00:35




창녀 Putain 

넬리 아르캉(지음), 성귀수(옮김), 문학동네, 2005.


1. 신시아에게.

신시아, 책에서만 보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 나도 너처럼 마른 여자가 좋아. 그러니 네 외모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예쁘지 않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네 맑은 눈동자는 나에겐 부담스러웠어. 너의 눈동자는 궁지에 처한 17살 소녀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낼 때의 그 빛깔을 가지고 있더군. 그러나 소녀는 한없이 사랑하는 어떤 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기만 하면 금새 풀려버리는 그런 종류야. 신시아. 그러니, 그냥 울어버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다행이야. 너와 키스만 했다는 게. 아마 너와 관계를 맺었다면 너는 날 공격했을 꺼야. 형편없다면서, 깔깔대며 웃었을 거야. 그건 네가 이해해줘야 해. 요즘 절대적으로 알코올 부족이거든. 그리고 이제 몸이 많이 상해 들어오는 알코올마저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더라고. 네 생각을 하니, 벌써 네 입술이 그리워지는구나. 하긴 그만큼 외로운 탓이겠지.

넌 아마 나보다 훨씬 더 외롭고 힘들 꺼야. 너의 글쓰기엔 그런 게 묻어 나와. 사람들은 네 글에서 문학성을 찾겠지만, 내가 보기엔 네 글쓰기는 너무 서툴러. 문학적 완성도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하지만 도리어 그게 널, 네 글을, 네 영혼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어. 하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니. 그런다고 네 삶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엄마가 네 아빠가 네 기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네 사랑이 뜻대로 되지도 않을 꺼야.

세상 대부분의 일은 네 뜻대로, 우리 기대대로 되지 않아. 루저(loser)같다고. 그래, 난 루저야. 잘 될 꺼라 생각했는데, 잘 되지 못했어. 어쩌면 네가 나보다 낫구나. 넌 몸이라도 팔아가며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난 그렇게 할 자신마저 없으니 말이야. 어쩌면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너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한 게 좀 그렇긴 해. 영업 중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무안했어. 나라도 혼자 술을 마실까 하다가 그만 두었어. 술을 마셨으면 네 슬픔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야. 도리어 적당량의 네 슬픔과 다수의 내 슬픔이 뭉쳐져 내 몸을 짓눌렀겠지.

너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난 정말 외로워. 누군가가 날 데려가줘’라고 악을 쓰는 것 같아. 하지만 너는 너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그 남자의 엉덩이를 세차게 네 작고 이쁜 발로 걷어낼 꺼야. 그리고 그 정신분석가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이 뒤집힐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야, 그 정신분석가가 너에게 갑자기 나타나,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나와 함께 가줘’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곧장 따라 나서지 않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세상은 그리 허술한 곳이 아니거든. 더구나 너도 나와 비슷한 루저(loser)야. 루저에게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공이야. 빌어먹을 종류의 것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것 말야. 정말 형편없는 짓이지.

더 이상 조각날 것이 없을 정도로 너를 파괴하고 싶었겠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도리어 세상에 대한 오기만 남지. 그리고 그게 한계야. 그래서 난 더욱더 세상이 싫어. 이 세상이. 이 세상은 변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늘 냉정하고 무관심하지. 그런데 그 세상을 보고 읽어대는 사람들이 변했어. 그리곤 자신들이 변한 건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맞다고 우기지.

벌써부터 네가 그립구나. 하지만 너와 난 친구가 되긴 너무 성향이 틀려. 혹시 몰라.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널 둘러싼 세상에 대한 배려를 배운다면 나와 친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는 너의 그 독특한 매력을 잃어버릴 꺼야. 후후. 다음에 갈 땐 화장품 세트라도 하나 사가지고 갈게. 네 비즈니스를 조금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 조심해. 안녕.


2. 신시아, 그녀는 창녀.

소설 <창녀>는 20대초반의 깡마른 듯 읽히는 어느 창녀가 혼자 거침없이 떠들어대는 독백체의 수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시적인 표현이라든가 우아한 문장이라든가 하는 건 기대하지 않고 읽는 편이 좋다. 도리어 황당할 정도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 세상에 대한 오해와 분노, 가족에 대한 애증의 감정, 그리고 너무 골이 깊은 외로움만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 신시아는 무릎 꿇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더 상처 입히고 모욕하며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도 세상에 대한 공격일까. 온통 자기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이 소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소설은 삼류의 저급한 고백록이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성은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놀랄 만큼의 뛰어난 문학성이라거나 충격적인 작품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고 뛰어난 문학성을 읽어내거나 소설 내용에서 충격을 받는다면, 읽는 이 자신이 그만큼 현대적인 어떤 경향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창녀’라는 직업은 그녀 고유의 공격 도구이다. 그리고 궁지에 내몰린 어린 영혼이 선택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녀는 시작부터 일반적인 의미의 ‘창녀’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창녀’를 택했고 ‘창녀로서의 존재’에 대해서 그녀 나름대로의 이해와 해석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 창녀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하거나 창녀에 대한 문학적 환상을 품는 건 대단히 잘못된 방식이다. 그녀는 오히려 남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창녀를 모욕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로 대변되는 어떤 여성상에 대한 반발과 모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남자들의 세계까지 모욕하고 싶어하고 남자들의 치부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아마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공격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그 공격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그 누구도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슬퍼할 것이다.

소설 <창녀>는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어떤 세계, 오직 자신의 이야기만 있는 어떤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자기자신 중심인, 자폐증의 세계를 향해간다. 그리고 결국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으며 스스로를 가두어버린다. 스스로 가두어놓고선 세상 탓이라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미성숙의 세계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실은 우리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그 자신만의 ‘신시아’를 남몰래 가두고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간 잘 가두고 숨겨놓은 자기자신의 신시아가 그 모습을 드러내어 소설 <창녀>에서처럼 울부짖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창녀 신시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의 신시아를 없앨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그저 잊고 지낼 수 밖에 없다. 우리들 마음 속의 창녀를 숨기고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다만 우리들 마음 속의 창녀 신시아가 나타나지만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럴 때, 신시아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만 조심하면 된다. 그뿐이다.

세상은 원래부터 그랬던 곳이고 우리는 늘 언제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였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가면 그뿐이다.



Nelly Arcan (March 5, 1973 - September 24, 2009) : https://en.wikipedia.org/wiki/Nelly_Arcan 



창녀 - 8점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