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공중곡예사, 폴 오스터

지하련 2002. 8. 3. 17:16
공중 곡예사 - 10점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폴 오스터, Mr.Vertigo, 열린책들.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트머리와 그 여자의 볼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푸른 빛깔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가 그러한 거리감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허공으로 몸을 띄우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을 띄운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우의적인 사건을 통해 소설의 여러 사건들을 끌고 가게 만드는 폴 오스터 특유의 장난이다.

이 소설 전체가 이러한 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그대로 관통하지 못하고 어떤 기만적인 태도, 즉 인생과, 혹은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두고 그 사이를 장난으로 채워버리는 폴 오스터 특유의 태도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폴 오스터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폴 오스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이 기만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폴 오스터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길잡이를 한다. 꼭 로베르토 무질의 <<세 여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외부세계에 대한 태도가 폴 오스터에게 와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어떤 교훈적인 것도, 인생에 있어 어떤 통찰도 말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 어떤 통찰을 말하는 것 같지만(월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들, 가령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따위의 말), 다 우스개소리다.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소설은 몸을 허공에 띄우기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이 어긋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우울함 따위를 선사하는데, 그 이유는 몸을 허공에 띄우든 띄우지 못하든, 우리 인생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우리를 인도해줄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