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개인주의의 역사, 알랭 로랑

지하련 2002. 12. 26. 11:44

 

 

1. 독서의 경험

밤 늦게, 대략 10시 쯤부터 읽기 시작한 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한길크세주 24)를 다 읽은 것은 새벽 3시였고 새벽 5까지 서평을 쓴다고 끄적이다가 서평이 아니라 요약본이 되어가는 모습에 쓰다 그만 두고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읽다 잠이 들었다. 오전 11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간밤의 독서 경험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노트를 해둔다.


2. 근대성의 문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글들은 무척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이 진짜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글은 드물다. 데카르트주의를 언급하지만, 데카르트가 현대의 허무주의적 태도와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태도가 왜 '반휴머니즘'인지에 대해서, 대부분 그 설명은 인색하기 이럴 때 없다.

이는 글이란 읽는 이에 따라 가치를 달리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점도 문제가 되지만(어쩌면 더 큰 문제이겠지만) 철학적인 배경에서의 '근대성'을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대Modern란 서구의 인식틀을 차용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식이 현재 한국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또한 문학 및 예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근대성 논의는 정작 그러한 근대성이 현대 문학이나 현대 예술에 어떻게 적용/구성/해체되었는지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 글이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3. 개인주의의 역사
 

개인주의란 개인을 중심에 두고 생각을 하는 어떤 세계관이다. 비판적 성찰과 자각을 할 수 있는 개인을 철학적으로 정초한 이는 데카르트이다. 이후 라이프니츠가 보다 공고하게 다듬는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중세의 유명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은 18세기 사드에게서 '출구없는 독단론'으로 빠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잘못된 결과으로 이러한 독자론이 언급되기도 한다.

홉스, 로크 등의 영국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내면적 능력과 함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주권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해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로크가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로크 이후 애덤 스미스와 벤덤에 의해 그 영향은 공리주의로 모아진다.

19세기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적 개인주의가 심화발전된다. 이제 일반 대중에까지 개인주의적 삶의 태도가 확산되는 시대로 온 것이다. 18세기까지 철학자들이 한 작업은 '돌연히 나타난 개인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사색하여 그 개념을 정착시키고 존재론적 기반을 확립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정당화시키고 자유로운 개인의 사회를 구성하는 이론적 원칙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에는 토크빌, 스펜서, 스튜어트 밀, 프레드릭 바스티아, 뒤르켐, 조레스 등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개인주의를 발전시킨다. 이와 더불어 절대적 개인주의라는 하나로 통칭되기 어려운 여러 다양한 개인주의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속한다. 이를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순진하거나 위선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개인은 옛날보다 자유롭지 않다. 개인은 여전히 사회의 노예이자 국가의 노예인 것이다. 사회는 도덕률을 통해(쾌락적인 삶은 고독한 내면의 삶처럼 거부당한다) 그리고 통제력을 행사하면서(독신자 - 이것은 모든 절대적 개인주의들의 상태이다 - 에 대한 '가족주의자'의 압력이 영혼을 심문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항상 무겁게 짓누른다), 진정한 개인의 독립에 음흉하게 적대감을 표시한다. ... ... 고분고분하고 비독립적이며 순응주의적인 대중은 개인화 과정을 왜곡시키고 희석시키고 타락시킨다'

니체의 경우, 그가 상정한 절대적 개인이란 '위험하게 살아야하고 타인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 한다. 또 어떤 국가나 계급에 소속되는 것도 단념해야 하며 '자아'의 실존적 빈곤함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개인의 주된 적은 그의 내부에 있는 자기 기만, 죄책감, 자기 혐오 등의 고질적인 나약성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움직임은 19세기 말과 20세기초 반개인주의적 사상에 의해 저지당한다. 즉 모두가 개인적 자유의 출현을 인류의 진보로 평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스캔들과 같은 것이었다.(루카치도 여기에 속하는데, 그는 그리스로마적 전체주의 세계관와 근대의 분열적 세계관을 대비시킨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이러한 반개인주의적 사상은, 하나는 메스트르가 일으킨 흐름으로서, 전통주의적이며 반동적임을 결연히 자처하고 철저하게 기독교적 색채를 띄면서 공동체 사회로 돌아가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생시몽주의자들이 추동한 흐름으로서, 공동체를 지향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평등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흔히 국가가 관리하는 집산주의적 형태로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개인주의를 넘어 미국에서는 급진적인 개인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히피나 여피란 단어는 이러한 급진적 개인주의가 문화/사회적 현상으로 반영된 것이다. 칼 포퍼나 하이에크, 루드비히 미세스 등(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에서 살았던 학자들)과 함께 데이비드 소로와 라이샌더 스푸너, 에인 랜드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급진적 개인주의의 심화에 대해 리스먼은 그의 책 <고독한 군중>을 통해 '어떤 의미에서 개인들은 전보다 더욱 분리되었지만 그렇다고 보다 자율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개인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동일한 집단적 모델-이 모델은 타인과 닮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모방 심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을 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4. 탈근대성, 개인주의의 어떤 귀결

거칠게 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를 정리해보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머리말과 맺음말이다. 저자는 개인주의에 대한 논의가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머리말에서 언급하고 맺음말에서 개인주의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극복해야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나 사드의 소설들에서 보여지는 독단론은 근대성의 어두운 면이다. 실존주의의 경우 많은 공격을 받아 요즘 언급하는 이가 드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먼의 생각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곤경을 헤쳐나가거나 방어할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의 구조주의자들(특히 미셸 푸코)이나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이론적 반개인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다듬는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들과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비판적 성찰과 반성이 가능한 개인에게 윤리의 원칙은 개인에게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칸트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개인주의를 옹호했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애덤 스미스와 벤덤에서는 '자기애'로 나타난다.(미셸 푸코는 이를 자기에의 배려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비판적 성찰과 반성은 과연 무엇이며 이것이 현대적 개인에게 가능한가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가 라이프니츠적 독단론을 극복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과연 존재할까? 개인은 개인 앞에 놓여진 고독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가족주의자들의 태도를 배움으로써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이 글을 끝내기로 한다. 안락사와 장기 매매는 동일한 문제이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 몸을 버릴 수 있는 권리이고 하나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권리에 속한 자신의 장기를 팔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둘은 동일한 문제이며 안락사와 장기 매매는 법률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