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지하련 2002. 12. 4. 00:36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푸른 역사, 2001





우리는 종종 우리가 역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역사적으로 평가받고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며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시간이 지나고 감정적인 편린들이 사라지고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역사의 세계’ 속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현재의 시간이 그 생생함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역사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편린들의 사라짐과 객관적인 시각의 확보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적인 예로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읽어낸 보기 드문 책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먼 미래에서 온 사람은 아니다.

역사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돌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삶을 되새기게 만드는 ‘지나간 미래’(1)인 셈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국사나 세계사 수업, 또는 대학의 교양 수업이 전부인 일반 독자에게 ‘역사의 세계’란 매우 딱딱한 어조와 무미건조한 서술로 이루어진 텍스트 속의 세계이거나 몇 년부터 몇 년까지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 구분이나 몇 년에 발생한 어떤 사건들의 조각난 연속일 뿐이다. 나 또한 그러한 속된 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해진 대학 교육과는 별개인 일련의 독서를 했다는 점을 되새겨보면, ‘탈역사화’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테마는 어쩌면 잘못된 역사 교육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역사에 대한 책은 무척 많다. 그만큼 번역할 수 있는 책이 많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일반 독자의 관심사가 지대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견의 여지가 존재하지만, 이보다 일반 독자로선 그만큼 좋은 책을 고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독자들은 그 역사적 배경이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양의 역사를 읽으면서 그 역사가 얼마나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책,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가 일반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읽힐 지에 대해 현재의 나로선 판단내리기가 무척 어렵다. 그 이유는 이 책이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형태-여러 소재와 주제에 대한 병렬적 구성-를 취하고 있으며 하나의 완결된 주제를 지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서평 하는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인 목차를 알려주는 것도 이 책을 선택하게 될 독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호메로스 새로 읽는 법
소크라테스, 역사에서 신화로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두 세계
노예 상인 티모테오스의 생애
위대한 신앙 해석자 바울
야만족 중세를 열다
불멸의 전설, 샤를마뉴
비잔티움 : 세계의 또 다른 절반
정복왕 윌리엄의 1066년
‘세계의 경이’ 프리드리히 2세
승리의 도시, 베네치아의 세계
근대를 연 항해왕자, 엔리케
이단의 네 얼굴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그리스도교 문명의 승리, 레판토 해전
대립과 극단의 시대, 바로크
돈키호테의 두 에스파냐

각 소논문들은 그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서술한 것이라 믿을 만한 것들이다. 특히 샤를마뉴와 에라스무스에 대한 글은 감동적이었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어떻게 옮겨오게 되었는가를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샤를마뉴 대제와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가령 중세 시대에 후대에 인문주의라 이름 부쳐질 전통이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서 지속될 수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에라스무스를 통해 근대 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2)

또한 중세의 시작, 야만적이고 미개한 북유럽의 민족들이 남하함으로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일반적인 역사서의 서술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다’라는 <야만족 중세를 열다>라는 논문은 중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대립과 극단의 시대, 바로크>는 흔히 예술의 한 양식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바로크가 그 당대의 정치, 학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는 한글로 번역된 보기 드문 글에 속한다.(3)

문학작품이나 예술양식은 그 당대의 역사를 이해할 때에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비잔티움에 대한 논문이나 바로크, 베네치아, 돈키호테에 대한 논문을 이와 관련된 매우 좋은 글들이다. 그 외의 글, 가령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을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르네상스 문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리스적 의미의 미덕과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미덕이 동일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부단한 열망에 있었다.’

우리는 르네상스 문학이나 서양 근대 미술사를 보다 보면 많은 예술가들이 종교적인 소재를 가지고 작업을 했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이 그리스, 로마적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데, 이 구절이 해답이 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보듯이 문학이나 다른 예술 장르를 이해하는데 있어 역사에 대한 이해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 그리고 일반 독자에게 역사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

1.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책 제목이다. Vergangene Zukunft. 역사학 전문 서적이라 일반 독자에게 추천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인문학 전공자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역사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철 옮김, 문학동네 모더니티 총서 4권)

2. 감동적인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서양 역사에는 세 명의 위대한 영웅이 각기 다른 시대에 등장하여 전 유럽 대륙에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들의 이름은 카이사르, 샤를마뉴, 그리고 나폴레옹이다. 그리고 이들 세 사람 가운데에서 역사상 가장 심대하고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샤를마뉴라고 할 수 있다.’

‘샤를마뉴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속적이었는가를 입증하는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우리가 읽는 영어 책에 인쇄된 활자체 - 그것은 서유럽 대부분에서 표준적인 서체가 되어 있다 - 는 카롤링거 서체라고 하는, 카롤링거 시대의 필사본에서 발전된 서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 고전 텍스트의 90%는 카롤링거 시대에 만들어진 필사본 또는 그 필사본의 사본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오랜 세월 이것들은 로마 시대의 필사본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왔고, 이런 이유로 인해 그 서체는 여전히 ’로마체‘로 불리고 있다’

‘토마스 모어가 비극적인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면,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사람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3. 실제로는 이러한 이해가 바로크에 대한 온전하고 정확한 이해이지만 국내에 번역된 책들이나 국내 학자들의 연구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바로크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하게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기대해보자.


호메로스에서돈키호테까지

윌리엄L.랭어저 | 박상익역 | 푸른역사 | 2001.03.1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