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불멸, 밀란 쿤데라

지하련 2003. 1. 4. 08:16
불멸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불멸 L'Immortalite'>>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 문학, 특히 소설에서 현대성, 내지 현대예술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기대해보자.



1.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반의 여러 예술들은 고전주의와 가까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 하인츠 보러의 경우 이러한 예술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 현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현대’, 다른 말로 현대에 나타난 고전주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부조리 연극들은 고전적 현대의 붕괴를 천천히 예고한다. 그리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가 무너지고 난 다음 처음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이다. 이 낭만주의는 장르나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의 허점을 노리고 이성의 한계, 이성적 기획들의 실패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낭만주의는 ‘감성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경향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다. 이 속에서 근대적 자아는 분열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분열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즐겁고 희망찬 일이기도 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몰역사적이며 성급한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불멸>에서의 낭만적 경향은 근대적 자아의 분열, 시간과 공간의 혼란, 소설 양식의 붕괴, 자의식 과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경향은 현대 소설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 원근법적 세계의 붕괴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종종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왜냐면 르네상스 초기 연극에서 원근법은 무대를 꾸미는데 매우 유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회화나 회화이론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무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있다. 이는 한 명의 주인공(소실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한다. 다시 부연하자면 프로타고니스트(제1배우, 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제2배우) 간의 대립과 반목, 갈등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음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영웅이, 그 영웅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영웅이 가슴에 품고 있는 신념이나 확신이 승리하거나 실패하게 될 때, 이러한 서사 양식을 원근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주의 연극은 이러한 원근법적 양식을 보여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원근법은 동일한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근대 소설들은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의 소실점 자리에 있는 한 인물, 서사의 주인공을 ‘근대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 마담 보바리, 고리오 영감, 줄리앙 소렐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붕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모네, 피사로 등이 보여준,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는 우리의 세계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가 믿어왔던 그 세계를 거짓이었고 기만이었음을 폭로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모더니즘 예술들은 근대적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 순수한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토 무질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모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으로 인해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넌 날 이해할 수 없어’라든가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그 골이 깊어진 독아론적 태도이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 양식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그 어떤 것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그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평면성은 하나의 원근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치들로 쪼개어지고, 그 가치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현대 소설에서는 한 명의 주인공에서 무수한 주인공으로 늘어나게 되고 종종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게 된다.

<불멸>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 시점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중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 소설은 사건 중심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며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불멸>은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의 내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한 개인의 내면은 다른 개인의 내면과 비교된다.

이 경우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각 개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교류에 대한 제약은 근대 개인주의의 비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호교감적인 형태의 정신적인 교류란 없다.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엇갈린다. 이러한 단절은 현대 소설에서 ‘다중 시점’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몸짓’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작 ‘몸짓’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3.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자의식 과잉

일반적으로 메타픽션은 소설가 소설, 내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해된다.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듯이 소설 속에서 소설에 대한 평가나 의미 부여, 비평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양식들은 사태나 인물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 소설 속에 갑자기 작가가 등장해 사건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거나, 비평문이나 인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메타픽션의 성격은 <불멸>에서는 매우 노골적이다. 자의식 과잉인 작가는, 소설의 창조주이면서 소설 인물들의 주인인 그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스토리의 방향을 보다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설과 인물에 대해서 떠든다.

현대문학이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며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픽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는데, 근대 소설이 원근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나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자아의 모험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험이 근대적 자아의 붕괴로 인해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로 이루어지는 주체의 분열을 야기하거나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작가가 고전적인 작가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을 실재하는 인물로 격상시키면서(작가는 소설 속 인물로 격하되고), 소설 속 세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불멸>에서 이러한 메타픽션의 경향은 소설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한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4. 사랑, 몸짓, 그리고 불멸

아녜스는 현대의 슬픈 사랑을 표상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스스로를 분석하며 지극히 정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로라는 현대의 행복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표상한다. 이 두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하지만 로라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로라에게 육체란 애초부터, 선험적으로, 전일적이고 항구적으로,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였다 : 즉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가져가 그의 앞에 그 육신을 내려다놓는 것. 내면 외면 할 것 없이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부드럽게 천천히 그것을 망가뜨리는 시간과 함께 말이다.
아녜스로서는 육체란 성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희귀한 순간들에만, 즉 흥분이 육체 위에 어떤 인공의 비현실적인 광채를 투사하고 그 빛이 육체를 아름다운 하나의 욕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줄 때만이 육체는 성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녜스가 줄곧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129쪽에서 130쪽)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벤스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류스티스는 그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독자는 아녜스 = 류스티스라는 등식을 이해하지만 루벤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것의 소멸을 어떤 충격적인 계시로 체험했다 : 그는 결정적으로 사랑 저 너머에 있게 된 것이다.
(362쪽)

사랑 저 너머에서 루벤스는 류스티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때 그는 얼마간 여자 관계를 끊는 것이 자기에게 나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그 휴지는 연장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몸짓을 통해 각 개인들은 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혹은 소설 바깥 세상에서 개인주의의 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불멸>에서 강조하고 있는 ‘몸짓’은 가느다랗게 이어져있는 사랑과 이해, 포옹의 표상인 셈이다.

‘호모 센티멘털리스’란 단어는 이 소설 속에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하기 사용된다. 사람은 많으나 몸짓은 별로 없다. 소설 속의 어떤 몸짓은 계속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폴이 그 몸짓을 하게 된다. 몸짓을 통해 각 인물들의 감정이, 정신이, 영혼이 연결되는 것일까.

불멸은 사랑의 불멸이 아니라 몸짓의 불멸인 셈이다. 몸짓의 불멸을 통해 다른 것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셈이다. 쿤데라는 원근법적 세계가 무너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며, 사랑은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고 생각 많은 어떤 이가 ‘물망초에 미친 여자’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는, 서로서로 단절되어있는 근대의 비극을 말하면서도 ‘몸짓’을 통해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고 오직 몸짓으로만 연결되는 세계. 그나마 몸짓이 남아 서로를 연결해주는 세계 말이다. 내가 보기엔 더 비극적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