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늘 그것들은 음악이거나 날씨 탓이다.

지하련 2008. 12. 16. 15:59


I Call Your Name-The Mamas and Papas in Monterey






몇 년 만에 낡은 일제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위에 중고 LP 가게에서 구한 마마스앤파파스 베스트 음반을 올려놓았다. 몇 년 동안의 먼지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사각의 방을 채웠다. 오래된 슬픔의 목소리들이다. 십여 년 전 마마스앤파파스는 왕자웨이의 영화 ‘중경산림’ 덕분에 철지난 유명세를 탔다. 나도 그 때 그들을 알았다.

그 때, 나는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시나리오만 쓰고 싶었다. 딱 그것만 하고 싶었다. 군대를 끝낸 후였고 복학하기 전이었다. 사랑을 하고 싶었으나, 난 늘 번번이 실패하는 쪽에 속했다(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원 중앙동의 작은 비디오 가게에서 오후 3시부터 새벽 2시까지 지냈다. 그 때 유독 슬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목숨을 걸고 싸울 자신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은 열정이었고 사랑이었지만.

하지만 내가 만난 슬픈 사람들은 고졸이거나 중졸이었고 젊었으나, 이미 몸은 늙어있었다. 지친 표정을 숨기기 위해 환하게 웃었으나, 어떻게든 탈출하거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이 십대 후반이거나 스물 초반이었다. 나도 스물 초반이었다. 나는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지금도 딱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철부지 대학생이었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랑을 하고 싶었으나, 육체관계에 있어서는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포장마차에서 그녀는 한 쪽 손목을 보여주며 얇게 가로로 나있는 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스물넷쯤 되었고 그녀가 스물 정도 된 나이였다. 그녀는 다른 쪽 손목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손목에는 얇게 가로로 두 개의 선이 나있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늘 무능했지만, 무능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만큼 끔찍할 때도 없다.

공테이프를 비디오 가게로 가지고 와, 비디오데크 두 대를 연결해놓고 틈만 나면 오래된 영화를 복사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우리를 사로잡았던 이들은 짐 자무쉬,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장 뤽 고다르였다.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비디오 가게 점원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듯이 나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소설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보았다.

내가 미술 쪽에서 일을 하리라곤 그 땐 생각하지도 못했다. 음악을 좋아했으나, 클래식은 아니었다. 서른 후반의 어느 초겨울, 연애를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의 아티클을 읽고 와튼스쿨의 뉴스레터를 받아보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의 내가 보기에 현재의 나는 얼마나 낯설고 생소한 존재일까.

어젠 기분 상한 일이 있어 혼자 치킨 한 마리에다 생맥주를 시켜 먹었다. 하지만 치킨은 반마리도 채 먹지 못했고 생맥주는 남기고 말았다. 와인을 마시려고 꺼내놓았으나, 다시 서랍 속에다 넣었다. 그리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누워, 새벽 한 시에 깨고, 새벽 2시에 깨고, 새벽 5시에 깨고, 결국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친구와 사업한다고 이 천 만 원 가까이 되던 적금이 깨었을 때,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아야 했다. 눈만 감으면 내 얼굴이 떠오른다던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낳았으며 나는 그 사실을 몇 년 후에 알았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친구 셋과 소주 열 두 병과 양주 두 병을 마시고 다음 날 오후에야 출근할 수 있었다.

갑자기 과거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그건 음악 때문이거나 날씨 탓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현란한 변명을 배우지 못한 탓에, 늘 그것들은 음악이거나 날씨 탓이다.


퐁피두 센터에서 왕두의 키스를 보면서 현대의 슬픈 연애를 본 듯해 가슴 아팠는데,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늘 사랑의 기대는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고 성급해지며 콘트롤이 안 되고 결국 실패하는 쪽으로 향해 간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어제 오후 늦게, 얼마 전 지원하여 최종면접까지 본 회사에선 다른 이를 택했다는 소식을 문자로 알려왔다. 나에게는 새로운 (구직)기회가 주어진 셈이고 그 회사는 나보다 더 나은 인재를 택했으리라.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 치킨과 맥주를 시켰으나, 올해 마지막을 연애 실패와 구직 실패로 끝내는 듯하여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일찍 잤고 늘 그렇듯 불편한 수면을 취했을 뿐이다.

마마스앤파파스는 딱 레코드판이 허락한 시간만 노래를 부르고 검은 JBL 스피커 속으로 사라진다. 나도 그들을 따라 스피커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이거나 목소리가 되고 싶다. 나에겐 아무런 마음이 없어서, 누군가가 찾으면 마음 없이 나타났다가 누군가가 날 귀찮아하면 마음 없이 사라지는 그런 사람이거나 목소리가 되고 싶다.

이제 5주째 들어서는 내 별난 생활,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은 어쩌면 내가 최초로 배운 가장 현란한 변명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것들을 현란한 변명들로 채울 예정이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인생이 될지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