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초겨울의 빛깔

지하련 2008. 12. 22. 16:17


 

내 서재가 있는 곳은 김포공항 근처의 작은 빌라 4층이다. 창 밖으로는 빼곡히 들어차 있는 빌라들의 옥상과 나즈막한 산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 12월말의 햇살이 건조한 색채의 빌라 외벽에 닿아 미세한 소리들을 만들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들이 오래된 먼지에 뒤섞여 내 빈곤한 영혼과 내 거친 폐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지만, 실은 나는 '아름다운 침묵'을 배우고 싶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순수한 열망이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백 년 전 소쉬르를 기억해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날 멘델스존과 자클린 드 프레는 사소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연말 근사한 공연이라도 한 편 보러갈 생각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행운은 날 찾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과 기억나는 것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도 없다. 제법 색감과 촉감이 좋았던 머플러를 잃어버렸다. 브루노 발터의 말러 교향곡 5번은 날카롭긴 했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일은 오랜만에 몇 개의 전시를 챙겨볼 생각이지만, 썩 유쾌할 것같지는 않다. 늘 그래왔듯이, 인구 천만의 도시의 초겨울 추위가 날 위태롭게 할 것이고 내 오래된 피부세포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라면, 아직 읽을 책이 있고 필요할 때마다 나는 바흐나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