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
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
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
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
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
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
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
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
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
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우울한 고양이>,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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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읽곤 아, 우울증은 쓸쓸했구나 라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젊은 시절의 사쿠타로도 꽤 쓸쓸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말년은 일본주의자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근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한국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1923년 시집, <우울한 고양이>
1924년의 하기와라 사쿠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