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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지음), 최성웅(옮김), 읻다 글은 무엇이고 책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의 시작은 어디이며 그 끝은 언제일까. 이 형이상학적 질문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끌어당기지만, 우리는 금세 그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어쩌면 포기일지도, 혹은 도망이거나, 실질적인 결론 없는 무의미에 대한 경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몽 자베스에게서 이 질문들은 글쓰기의 원천이며 삶의 의지이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향기다.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는 미완 속에 우리를 내버려둔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를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

우리는 이제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자 의사인 노태맹의 글을 읽으며 내 단상을 적는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하며 깨닫게 한다. 실은 지금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며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은 우리들이, 이 사회가, 저 (빌어먹을!) 정치인들이, 그리고 국가가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 지난 정부 때는 참 바보 같았던 공무원들이 움직이고 그 중심에는 바뀐 대통령이, 그 뒤에는 촛불을 들었던 우리들이 있다. 한 때 국가가 어디 갔냐며 울었지만, 지금은 국가가 알아서 움직이며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그럼에도 입만 열면 비난을 하고 트집을 잡으며 시비거리만을 찾는 야당 정치인들과 그 무리들, 자신들의 존재를 어젠 정권에 빌붙어 찬사를, 지금은 어떻게 든 흠..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슬아(지음), 헤엄, 2018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추천했다. 나와는 참 멀리 있는, 그러나 어쩌면 나와 비슷한 꿈을 꾸는, 그러면서 당돌하고도 비현실적인 도전 , 한 달에 스무편의 수필, 월 구독료 만원, 이메일로 배달되었던 , 우리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접근이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독자를 모으며 급기야 책을 내어, 여기저기서 찬사를 받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쉽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슬아는 스스로 자신을, 자신의 친구들을, 그리고 가족들을 드러내며, 천연덕스럽게 글을 쓴다. 그렇다고 일본의 사소설적인, 그런 게 아니다. 일기도 아니다. 수필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이야기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같기도 하고 이슬아만의 렌즈 - 기막히게 매력..

최근

1. 최근 블로그 상에서 바로 글을 써서 올린다. 그랬더니, 글이 엉망이다. 최근 올린 몇 편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의 호흡은 끊어지고 단어들이 사라지고 불필요한 반복과 매끄럽지 못한 형용어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몇 번의 프린트와 펜으로 줄을 긋고 새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끼인 세대인 셈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끼인 세대.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지만, 읽기는 무조건 종이로만 읽어야 하는. 그래서 최근 올렸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쓰고 고쳐 새로 올릴 계획이다. 얼마나 좋아질 진 모르겠지만. 2. 헤밍웨이의 를 읽고 있다. 무척 좋다. 번역된 문장들이 가지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데,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영어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된 셰익스피..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벚꽃과 술

몇 개의 글 소재, 혹은 주제를 떠올렸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했지만, 가끔 글도 참 못 쓰고, 지적 성실성도 지적 통찰도 없는 이들이 교수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럴 여유가 존재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동한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쓸쓸한 개인만 남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금 한국엔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서른 초반에 했고 자본주의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나를 마흔 초반에 발견했다. 쓸쓸하다. 벚꽃은 어김없이 봄이면 핀다. 벚꽃이 머리 ..

회사 생활, 그리고 글.

일주일에 한 번 운동을 한다. 이마저도 힘들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8시. 저녁을 먹고 아이와 놀다 보면 9시, 10시, ... 이러면 운동하러 가지 못한다. 그리고 잔다. 꿈을 꾼다. 꿈 속에서도 나는 쫓기고. 그러다보면 아침이 오고 곱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힘을 내자고 다짐을 한다. 이렇게 아빠,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된다. 종종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다. 이렇게 늙었다니. 그러고 보면 늙는다는 걸 인식하며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늙었구나 하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 때 뿐이다. 나는 아직 클럽에 갈 수 있다고 여기고(간 적도 없지만), 아직 옆을 지나는 여대생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말을 건 적도 없지만).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지..

리처드 브라우티건

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독자의 태도

일년 반 정도 모 통신사의 사보 편집장 했는데, 유명하다는 몇몇 필자들의 형편없는 원고를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결국엔 일반 독자에게 어필해야 된다는 것이니, 나에겐 요원한 일이다. 제대로 된 글을 읽으려면, 그만큼 독자도 준비해야 된다. 바둑판을 읽을 수 없으면서 바둑을 두겠다고 하는 것이나, 글의 품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읽으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