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37

어원 쇼의 '실패'

실패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실패에 대한 글들을 모을 생각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료도 조금 모았으나, 정리하지도 못했고. 어윈 쇼Irwin Shaw의 문장을 옮겨놓는다. 조금의 위로가 된다. "누구에게나 실패가 성공보다 더 지속적으로 찾아옵니다.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 사는 것과 같지요. 가끔 화창한 날도 있지만 대개 밖에는 비가 내리니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튼 실패는 자기 연민을 낳기 쉬운데 제 경험상 자기 연민은 대단한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어원 쇼 (소설가)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한은형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한은형(지음), 난다 한은형의 산문집을 읽었다. 실은 그녀의 소설을 읽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 그녀도 후기에서 밝히듯 상당히 어렵게 쓴 글들이다. 어쩌면 베를린과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뤼벡과 드레스덴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뜬금없이 이 산문집을 읽게 된 건, 십수년 전 그녀의 짧은 글들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런 글을 읽은 적이 거의 없고 글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터라, 우연히 그녀의 산문집을 산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읽었던 그 때의 글과 비교하면, 긴장감은 거의 없고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랄까. 살짝 우울해졌다. 그녀가 찍은 듯 보이는 사진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베를린과 소설가 한은형은 어울리지 ..

아메리카의 망명자, 아리엘 도르프만

아메리카의 망명자 아리엘 도르프만(지음), 황정아(옮김), 창작과비평사 1973년, 자신을 고국인 칠레으로부터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던 파리로 도망치게 만들었던, 칠레를 깊고 긴 독재 국가로 변하게 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의심되던 망명지 국가에 정착하게 된 아리엘 도르프만은 어떤 기분일까. 민주화된 칠레 대신 미국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정착하게 되는 칠레. 그러나 민중을 위한 희망을 안고 하나둘 칠레를 일으켜세우던 아옌데 대통령은, 이를 방해하는 미국과 글로벌 대기업의 모략 앞에서 힘겨워 하다(아옌데 대통령 집권 이후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악화된다) 결국 그들의 지원에 힘입은 삐노체트와 그의 군대가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하다가 끝내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어니스트 헤밍웨이(지음), 주순애(옮김), 이숲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너무 유명한 나머지, 시간이 지날수록 소홀히 대하게 되는 소설가가 아닐까. 너무 이른 나이 -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 에 , , 를 읽게 되고, 성숙하지 못한 정신으로 조각난 이해만을 가진 채,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들은 나이가 듬에 따라 잊혀져 간다. 대체로 고전이라고 알려진 것들 대부분은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잠시 우리 곁을 머물다가 사라진다.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현대 영미 문학사에서도 헤밍웨이의 소설들은 길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들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전후 문학의 특징이 아닐까. 전쟁(의 ..

이런 봄날이었을까

이런 봄날이었을까, 가벼운 흰 빛으로 둘러싸인 꽃가루가 거리마다 마을마다 흩날리던. 내가 앙드레 드 리쇼의 을 읽고 아파했던 날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지금도 있으려나, 그래서 봄이면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금기). 그리고 그 환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으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까막눈이었다(지금도 그런 듯). 그 때 그 시절, 나는 을 읽었다. 기묘하고 아름답고 슬펐다. 알베르 까뮈가 격찬했고 조용히 번역 출판되었다가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 소설이었다. 몇 해 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기억을 더듬을 ..

데보라 레비Deborah Levy가 이야기하는 다섯 권의 책

이젠 습관이 된 탓에 시간의 여유만 생기면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글들을 수시로 프린트해서 읽는다. 며칠 전에 읽은 인터뷰에 몇 권의, 인상적인 책 소개가 있어 옮긴다. 다소 생소한 작가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고, 내가 미처 몰랐다는 사실이 다소 미안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라는 메시지로 사회 참여를 강하게 외쳤던 오드리 로드, 영국 출신이면서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세례를 받은 화가이자 소설가 레오노라 캐링턴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였다. 셜리 잭슨은 이미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기도 한, 고딕 호러 분야에 있어선 최고의 소설가였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데보라 레비는 흥미로운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도 이미 영국의 부커상 최종 후보로 여러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의 . 소설을 읽는 내내, 루시디가 추천하는 몇 권의 책 안에 들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하지만, 다 읽고 난 다음 그가 왜 이 소설을 왜 추천했는지 알게 된다. 몇몇 이들은 이 소설을 영국의 아동법 등의 여러 법률에 근거한 법과 종교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그건 잘못된 해석이다. 판사가 나오고 소설의 많은 장면들이 법정이거나 법과 관계된 사람들로, 혹은 종교와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이를 법과 종교의 문제, 그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모든 이들이 탁월한 소설 비평가가 될 것이다. 결국 읽는 이에 따라 소설에 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양윤옥(옮김), 현대문학 소설 쓰는 게 영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소설 쓰는 법에 관심을 기울인 듯 싶다. 실은 소설 쓰는 법 따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소설 쓰는 법을 배우고 소설가가 되는 경우보다, 그냥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우연히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후, 몇몇 작가들은 소설 쓰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작법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다. 결국 내가 소설 쓰는 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소설 쓰기와는 무관하게, 소설 쓰기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리고 소설 쓰는 법을 이야기할 정도로 수준 있는 소설가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내 동경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젊은 하루..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헤밍웨이(지음), 권진아(옮김), 마음산책 헤밍웨이가 너무 유명했던 탓에, 내가 그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것이 세계문학전집의 폐해다. 헤밍웨이의 소설들 - 나 -을 고등학생이 읽고 이해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리고 그 시절 이후 헤밍웨이를 읽지 않았고, 이 사실마저도 이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헤밍웨이가 말년에 행한 인터뷰들을 소개한다. 뭔가 깊이있는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는, '아, 헤밍웨이구나'정도랄까. 그래, '헤밍웨이'. "작가는 우물과 비슷해요.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습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고 끝냈을 때는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시작만 할 수 있으면 괜찮아..

샘 쉐퍼드Sam Shepard

내가 수줍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샘 쉐퍼드Sam Shepard가 73세의 나이로, 수다스러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했던 이 세상과 헤어졌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재능이며, 그의 언어가, 그의 표정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며 혼자 숨겨두었던 존재들이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연결고리는 없겠지만, 모나드 바깥에선 단절된 모나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 때 생각했지만, 태어남-죽음은 하나의, 일체의 모나드임을.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궤도를 돌아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궤도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주자. 샘 쉐퍼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