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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겼다. 우산 밖으로 나온 가방, 신발, 입은 옷들의 끝자락들, 그리고 내 마음과 이름 모를 이들로 가득한 거리는 비에 젖었다. 


비 내리는 풍경이 좋았다. 내 일상은 좋지 않지만, 비 속에 갇힌 거리의 시간은 음미할 만 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은 글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 술이나 마셔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일이 많구나)



비 오는 그림을 좀 찾아봤는데, 거의 없다. 비 내리는 풍경이 회화의 소재로 나온 것도 이제 고작 1세기 남짓 지났으니.. 


Gustave Caillebotte  (1848-1894)

Paris Street; Rainy Day,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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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에 대한 세잔의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바가 없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세잔의 영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큐비즘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현대 미술가들은 세잔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내가 현대 미술에 대한 긴 글을 쓴다면, 뒤샹과 세잔만으로 글의 초반을 장식할 것이다. 뒤샹은 현대 미술을 난장판으로 만든 이라면, 세잔은 현대 미술을 견고하게 만든 이다. 과거와 단절하고 현대 미술이 끊임없는 혁신을 감행하게 된 계기는 뒤샹이고, 현대 미술이 과거의 역사와 단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현대 미술 또한 서양 미술사의 한 챕터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에 한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세잔이 될 것이다. 


그는 현대 문화의 내향성을 최초로 들어내 보이며, 우리 마음 속의 기하학에 주목했다. 고전적 현대, 혹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만든 예술가이다. 그리스 고전주의,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외부에 존재하는 기하학을 찾았다면, 세잔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임을 드러냈다. 


큐비즘은 세잔의 직접적 영향 속에서 기하학주의를 전면에 드러낸다. 세잔 이후 모더니즘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하학주의로 예술을 지배한다. 아마 연구자들은 프랑스의 누보 로망이라든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이라 이후의 문학들 속에서도 기하학주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래 피카소와 세잔의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나에게 여유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음악과 문학 작품을 찾아 나열해볼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럴 여유가 없구나.) 



Pablo Picasso, Bread and dish with fruits on the table, 1909, oil on canvas, 164 x 132.5cm, Kunstmuseum, Basel 





Paul Cezanne, Still Life, oil on canvas, 60*73cm,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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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전 -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

국립중앙박물관, 2014.5.3 - 8. 31 





몇 해 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서 놀라웠던 건, 1층에 놓인 거대한 작품들 - 제롬이나 부게로 같은 화가들이 그린 - 을 보면서 참 식상하다는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4층(?)의 낮은 천장 아래 놓인 작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앞에서 전율같은 감동을 느껴졌을 때였다. 어쩌면 예상되었을 법한 일일 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예상했던 범위 이상이었고 그 놀라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르세미술관에서의 그 경험에 비한다면,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다소 어수선하고 산만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급하게 보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 집중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 도록을 꼼꼼히 읽으면서 몇 점의 작품은 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나의 경우, 이미 국내에 번역된 대부분의 인상주의 연구서들을 읽었고 인상주의와 관련해선 아예 한 학기 수업까지 들었던 터라 왠만한 전문가 이상으로 알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니, 이젠 가물가물해지는10년 전 버전의 지식으로 인상주의를 안다고 하기 조심스럽기만 하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공부하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 직업을 가졌을 때의 내 모습(괴팍스러워 보이는)도 상상되어, 약간의 다행스러움도 있다.



1. 인상주의, 현대 미술 (시장)의 개화  


사실 제일 처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던 1874년의 상황은 간단했다. 제도권 기관인 살롱전의 부당함에 대해 반발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 1886년의 상황은 달랐다. 미술 시장에 대한 화가들 스스로의 독립성을 정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 전시 도록, 13쪽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인상주의의 미술사적 의의는 너무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것들.  


- 반-원근법적 세계관의 시작

- 문학적 세계관에서 회화 그 자체에의 집중(물질성의 강조)  

- 기하학적 세계에서 벗어남. 혹은 새로운 기하학의 시작. 

- 탈중심화, 탈가치화 


그런데 막상 적고 보니,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건 서양 미술사 교수님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고. 실은 위 짧은 인용문과 관련해서 (내가 아는 바를) 언급하자면, 인상주의 이전의 미술 시장과 이후의 미술 시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장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공공연하게 인상주의 미술이 현대 미술 시장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할 정도이고, 그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국에서의 인상주의 열풍이었다. 지독한 무시와 냉대, 가난 속에서 인상주의가 시작된 것과 반대로, 인상주의 화가들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다. 고독한 몇 명의 천재들을 제외한다면. 


19세기는 그 전까지 일종의 미술가 생계 수단 프로그램이었던 패트런이 사라진 시대였다(귀족 계급이 힘을 쓰지 못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8세기에 시작된). 부르조아지의 등장과 전통적인 성직자와 귀족 계급의 후퇴가 직접적인 영향이었으며, 이 때부터 미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고, 인상주의자들의 시작은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미술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 미술 권력과 싸우면서 동시에 미술 시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1886년 전시는 미술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올라간 인상주의 화가들의 (미술 시장에서의) 자리 잡기가 중요해졌다. 뭐, 이 때에도 위대한 세잔은 무시당하고 있었지만. 


"지난 15년 간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이 공격을 받고 가장 대우를 못 받은 화가는 바로 세잔이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 모욕적인 수식어란 수식어는 모두 갖다 붙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작품에 대고 폭소를 터뜨린다."

- 조르주 리비에르, 1977년.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세잔의 탁월함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궤적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동선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시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인상주의, 그 이후

2. 새로운 시각, 신인상주의

3. 원시적 삶을 찾아서, 고갱과 퐁타방파

4. 반 고흐와 세잔, 고독한 천재들

5. 파리, 아름다운 시절

6. 세기말의 꿈, 상징주의와 나비파. 


많은 수의 작품이 전시되진 않았지만, 천천히 깊이 살펴본다면 이번 전시 관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이 꽤 어려운 일임을 안다) 



2. 내 마음에 들었던 주요 작품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야외에서 그린 인물 :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양산을 쓴 여인 

Essai de figure en plein air: Femme 'a l'ombrelle tourne'e vers la droite 

oil on canvas, 131*88cm, 1886 



이 작품은 왼쪽 버전과 오른쪽 버전이 있고, 이번 전시에선 오른쪽 버전이 전시되었다. 


이 두 작품의 모델은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의 딸 수잔 오셰데이다. 그는 친 자녀와 의붓 자녀 모두에게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수잔이 서른 살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 전시도록, 41쪽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와르 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앉아 있는 젊은 여인 Jeune fille assise 

oil on canvas, 65.4 * 55.5 cm, 1909 




풍만한 몸매에 널찍한 얼굴, 관능적인 도톰한 입술, 상큼하고 혈색 좋은 얼굴빛, 그리고 까만 머리칼의 엘렌 벨롱은 그 미모가 르누와르 자신의 이상적 여인상에 부합했기 때문에, 르누와르로서는 이런 엘렌의 모습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쥘의 약혹녀를 모델로 세우기까지는 수개월 간의 설득 기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르누와르는 그에게 옷을 입힌 상태에서 모델을 그리겠다는 약속도 해야 했다." 

- 62쪽 



작품 이미지를 찾기 위해 구글링을 해보니, 똑같은 제목의 아래 작품도 있다. 제작년도를 보니, 19년 차이가 난다. 나머지는 보는 이들이 알아서 해석하길. 



Renoir 

Jeune Femme Assise 앉아있는 젊은 여인

oil on canvas, 91 * 72cm, 1890.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시인 외젠 보흐 Eug'ene Boch(Le po'ete) 

oil on canvas, 60.3*45.4cm, 1888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호화로운 청색 배경은 그의 이상향을 떠올려준다. 예술가들 사이에 영원하고 보편적인 애착 관계가 자리잡길 바란 것이다. 별의 무한성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들을 한데 엮으면서 예술적 창작력의 무한한 삶을 구현하려던 그의 생각은 친한 동료 화가의 이 초상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외젠 보흐의 이 초상화는 외젠 보흐 보인이 루브르 박물관에 유증했다. 

- 115쪽 


 


폴 시냐크 Paul Signac (1863 - 1935)

안개 낀 에르블레, 작품번호 208 Herblay, Brouilladr, Opus 208 

oil on canvas, 33.2 * 55 cm, 1889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폴 시냐크의 그림이 다른 후기 인상주의 어느 화가들보다 더 끌린다. 이건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하자. 


대기는 평온하며, 색조는 서서히 옅어진다. 정밀하고 규칙적인 붓 터치는 흰색 위주의 창백한 빛을 분산시키고, 노란 빛과 푸른 빛은 가까스로 느껴지는 정도다. 집요할 정도로 대칭적인 구도는 정적인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지평선을 중심으로 화면이 정확히 둘로 나뉘는데, 수면에 반사된 풍경만이 물의 흐름으로 아주 약간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 전시도록, 72쪽 




에드가 드가 Edgar Degas(1834-1917)

메닐 위베르의 당구대가 있는 방 Salle de billard au Menil-Hubert 

Oil on canvas, 50.7*65.5cm, 1892



"당구대가 있는 실내 풍경을 그려보려고 하네. 내가 원근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공간 안에서 각도를 재고 수직과 수평을 열심히 연구하면 원근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네." 

- 드가, 1982년 



이번 전시에선 드가의 조각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실은 이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듯 싶다. 


3. 전시장 풍경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를 한다고 해서 전시의 상업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상업성이라는 단어 대신 대중을 보고 쉽고 편안하게 끌어들이기 위한 전시 환경의 구성이 아쉬었다. 인상주의 미술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참여 프로그램의 운영(돈은 안 되고 노력만 들어가겠지만, 이것이 바로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아닐까)이라든가,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의 확보, 다양한 미디어의 활용 등은 전시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비파의 몇몇 눈 여겨볼 만한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 작품들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자. 실은 이 글을 적는 것도 나에겐 꽤 벅찬 일이다. 시간적으로... ㅡ_ㅡ;; 전시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보기로 하자.  아래는 나비파의 한 명이었던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이다. 




피에르 보나르, 흰 고양이, 1894. 


위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은 아니지만, 도록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인용해본다. 



19세기 후반의 약 30여 년간, 고양이는 예술 작품 속에서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보헤미아인, 극장식 까페 등과 연계하여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던 한 세대의 상징적 동물이 된다. 

- 270쪽 



과연 그랬나? 흥미로운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애완동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고양이에 대한 예술가들의 애호는 꽤 유래가 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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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의 초기 작품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배워왔던 페인팅과 앞으로 나아갈 페인팅이 서로 섞이고, 작품을 통해 성취하고 하는 젊은 열망들이 색채로 뿜어져 나온다고 할까. 한 때 '젊음'에 대한 평문을 쓰고 싶었는데, ... 지금이라면 가능할까. 오랜만에 르느와르 작품들을 찾아 봐야겠다. 





-- 

2003년 11월 28일에 쓴 글. 






Young Boy with a Cat

1868-69

Oil on canvas

43 3/4 x 26 1/4 in (124 x 67 cm)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을 보면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약간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은 르누와르의 초기 작품으로 고양이를 스다듬는 소년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앞의 꽃무늬 천이나 고양이의 처리는 무척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소년의 누드는 무척 이국적이면서 애로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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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답네요..카프카라니,.. 공감입니다. 뭔가호밀밭의파수꾼이 되기전모습이랄까요?^^

    • 그 때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잡지에 글 하나를 썼고요. 그 이후로 하루키를 손에 든 적은 없네요. ㅋ. ~ 호밀밭의 파수꾼은 ... 뭔가 사고 치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파수꾼 되기 전이라면 ... ㅎㅎ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이 글은 몇 달 전에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글의 일부다. 그 사이 세상은 꽤 변했고 ... 하지만 쓴 글이니.. 끝까지 다 쓰고 올릴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서두부터 올리고 글이 씌여지는 대로 업데이트를 할 생각이다.   




2011년을 되돌아보며



01. 풍경으로서의 정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난 뒤, 그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한 반성 표명 없이 스스로 일신하겠다며, 박근혜 의원을 중심으로 헤쳐모여 하고 있다. ‘비대위’라는 상징적 기구를 통해 일신의 모양새를 만든 후, 친이계와 현 MB정부를 압박하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지만, 이건 그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드러낼 뿐이며, 보는 이들을 향해 풍경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보는 이들의 자리로 와서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건 즉물적 세계다. 인상주의적 세계다. 공감적 세계가 아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거리, 어느
비오는 날', 1876~1877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지난 몇 년 동안 MB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세계가 바로 이런 즉물적 풍경이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 리그 속에선 평범한 농부 옷차림으로 논두렁 사잇길로 자전거를 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타자의 세계를 넘어서 미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해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였고, 대통령 당선자체부터가 아주 우연적인, 심지어 한국 현대사에선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던 셈이다. 왜냐면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사라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건 마치 질병 같은 것이다. 순결한 어떤 풍경 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였다. 대통령이 되면 말을 아끼고 지시만 내려야 되는데, ‘대통령 못해 겠먹다’고 하지 않나, 자신을 지지해준 정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탄핵소추를 받는가 하면, 심지어 진보언론으로부터 무시당하던 대통령이었다. 낯선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적 리더십의 세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등장했고, 평범한 우리들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넓은 호수 위에 한 점 기름이 그 세력을 넓혀가는 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호수에 속했던 자들과 그 호수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들은 이제 머지 않아 순결하기만 했던 특권적 한국 정치의 호수에 아무나 발을 담글 수 있겠구나 하는 염려가 퍼져나갔고 결국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초가 탄핵이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너, 나, 우리』를 통해, 여성의 육체를 높이 평가하며 여성성이란 정체 불명의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타자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이 세상 밖으로 창조해내는 신비라고 말한다. 이렇게 여성성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체계이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되는 가치가 된다.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배타 지향적 세계라면 반-풍경으로서의 정치는 이타 지향적 세계가 된다. 실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어느 곳에서는 열광적 지지가 이어지고 여러 저널에서의 여론 조사의 지지율이 계속 높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풍경으로서의 정치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 밖에 없는 세계에선 그 도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비교 대상, 즉 옳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비교대상이 생기더라도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겐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와도 같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풍경에 익숙해진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 짧은 글은 작년 한 해를 뒤돌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혹자에게 이 글 서두의 정치 이야기가 낯설지 모르겠지만, 최근 읽은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의 『권력의 지배(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 』은 나로 하여금 바람직한 의미의 권력Power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은 나는 권력 지향적이지 않다(그래서 혹자들이 보기엔 둔해 보이고 비현실적이거나 마냥 희생적인 케릭터로 보이게 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반-권력적이다. 수직적인 질서를 싫어하고 수평적이길 원한다. 사각형 회의 테이블을 싫어하고 원형 테이블을 좋아한다. 하지만 전략 실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구조 속에선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들조차도 논리적 접근, 혹은 옭은 제안이 거절되기 일쑤인 현실 세계에서 권력이란 옳고 바람직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인간 중심적’(Human-Centered)여야 한다. 실행 중심적이 아니라!



* 작품 설명.
인류의 지적 구조물을 버리고 순수하게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인 세계만 옮겨야 한다는 확신이 서자,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작품의 대상이 되고, 또한 그 대상의 외면만으로도 어떤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란 그 중요성을 점차 상실해간다. 인상주의의 세계다. 인상주의에서는 익명성이 부각되고 도시가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의 공간이 되며 삶의 순간성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카유보트는 도시 산책자로 거리를 거닐면서 거리의 한 순간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리고 사각의 캔버스로 옮겨진 그 풍경에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지적인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채 그저 물질성만을 강조하고. 이제 외부 세계는 나와 무관한 어떤 세계이며, 나도 그 세계 속에서 익명의 어떤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포디즘적 세계에서 한 사람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이듯, 인상주의적 세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독특함이나 개성, 독자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파시즘에서는 과학 기술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상주의적 세계의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풍경으로서의 정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일반 서민의 풍경이 바로 인상주의적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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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파아란 영혼을 운영하고 있는 지하련(김용섭)입니다.

 

1차 독서 모임 공지를 올릴까 합니다.

 

원래는 참가 신청 인원이 꽤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참가 신청 인원이 적었습니다.

 

역시 빡센독서 모임이라는 생각에 몇몇 지인들만 참가 신청을 해주셨습니다.

 

일정과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6 2일 수요일 오후 4

강남 토즈(www.toz.co.kr) 2호점.
http://www.toz.co.kr/booth/jb_booth/booth_jb_basicinfo.asp?idx=1 

모임명: ‘빡센독서모임.

 

 

1차 독서 모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독서 모임의 운영 / 앞으로 1년 동안 읽었으면 하는 도서 목록

 

-       독서 모임과 관련 없지만, 들으면 좋은 서양미술사특강

인상주의과 반-모더니즘 (Impressionism and Anti-Modernism)

l  서양 미술의 역사

l  원근법주의와 도구적 이성

l  반 이성주의와 감각

l  인상주의와 현대 미술

l  포스트모더니즘

 

-       그 외 수다와 잡담 / 간단 저녁 식사

 

 

회비: 1인당 3만원

 

혹시 관심 있거나 참석하실 분은 저에게 메일(intempus@naver.com)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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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콩세알 2010.06.03 18:26 신고

    어제 강의 잘 들었구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 콩세알 2010.06.10 07:08 신고

    저번에 이야기를 들을때 좀 아리송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찾아서 올려봅니다. '가령 갈릴레오와 뉴턴에서 시작된 근대 물리학의 탄생은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결렬을 뜻했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중에서 / '근대과학이 시작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상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며, 신플라톤주의는 이탈리아 자연철학의 주요 요소가 된다' - 막스 야머의 '공간 개념' 중에서.
    그래서 뉴튼의 물리학은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반기를 든 것이며, 오히려 그의 절대공간 개념은 플라톤주의의 부활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막스 야머에 의하면 거기에는 유태교적 절대신, 신과 공간을 하나로 생각하는 유일신적 사고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만요.)

    • 아니,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저에게.. ㅡ_ㅡ;;;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12세기 이후 다시 부활합니다. 중세 신학자들, 특히 아퀴나스에 의해서. 따라서 이 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중세적 패러다임 속에서 해석되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하지만 워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사상과는 무관할 정도로 자주 등장해, 어떤 학설의 배경으로 지목당하곤 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이번 주말에 한 번 포스팅하도록 ... ^^;;;;

* 몇 년 전에 적었던 글을 업데이트해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Le fifre (The Fifer)
1866; Oil on canvas, 160 x 98 cm (63 x 38 5/8 in); Musee d'Orsay, Paris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의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회화 공간의 평면화이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될 평면화가 마네에게 있어서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는 것이다. 즉 환영주의나 눈속임(Trompe l'oeil)로 이름붙여진 어떤 전통이 후퇴하고 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양식이 두드러지는 최초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평면적 구성이 서양의 사상사나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매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배경 사이에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어져 있다. 특히 신발은 매우 독특하다. 이는 실제 모습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회화적 특징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이제 현실의 재현을 희생하고 회화적 효과에만 치중하는 방향 전환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래 두 우키요에 작품을 붙인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한 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근세 유럽에 문화적으로 끼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특히 북동아시아의 변방 나라로 인식되던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 세계에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 한국이 고작 IT나 전자제품 등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일본은 만화, 소설, 패션 등 문화적인 것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이미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http://www.lib.cyut.edu.tw/act/lact/93_library_week/contents3_4.asp 


Yoshitoshi《Heron Maiden》,1889,浮世繪
http://vr.theatre.ntu.edu.tw/fineart/chap10/chap10-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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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 일찍 나와, 세느강 옆을 걸었다.

서울은 마치 표준화, 규격화, 효율화의 전범처럼 꾸며져 있다면, 파리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르다. 얼마 전 서울시 청사의 재건축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문화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느강 옆을 걸으면서 보게 된 강 옆에 놓인 배들의 모양 하나하나는 각각의 개성을 살려 설계되고 장식되어 있었다.

동일한 디자인의 아파트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서울은 꼭 20세기 초 근대주의자들의 잃어버린 로망을 되살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보인다. 하나가 잘 되면, 그 하나를 따라하기 바쁘다. 한국 사업가들이 '벤치마킹'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 있어 세계가 놀랄 정도의 시간 단축을 보여주었지만, 개성화나 창조성의 부분으로 들어가버리자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떠들고 있는 '잃어버린 10년'이 바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10년'이다. 이는 좌파(이 표현만큼 부적절한 것도 없을 텐데. 실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편의상 사용한다.)적 정책과는 무관하다. 현 정부의 잘못된 정치적 주장이 잘못된 정책 수립과 집행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잠시 유예된 미래를 파리에서 보내고 있는 나는 마자랭 72번지 갤러리 프레드릭 모아장(Galerie Frederic Moisan)에서 하루의 반을 보낸다. 그리고 갤러리 닫는 시간 쯤, 오데옹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샤틀레 역에서 일드프랑스로 나가는 A4 전철로 갈아타고 뷔시 생 조지 역에서 내려 숙소가 있는 골프장 마을까지 걸어간다.

어제서야 비로소 미술관을 갔다.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은 이 곳이 19세기 중후반 미술에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는 뮤제 오르세임을 알게 해 주었다. 약 3시간 동안 관람을 했다. 하지만 나는 빈 노트 하나 들고 나와 하루 종일 앉아 작품 보면서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많은 전시와 아트페어를 다니면서 무수한 현대 작품들을 보아왔으나, 1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근대 미술 작품 앞에서 얼마나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이 절망했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미술(부게로, 제롬 같은 이들) 앞에서 A3 사이즈의 정도의 작품들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매혹시켰으며 끊임없이 물결치는 위대한 예술의 바다를 창조해낸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자들과 그 후예들을 만나면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르세를 나오는 길에 책 몇 권을 사들고 나왔다. 잠시 한국 미술에 대해 생각했다. 온통 꽃 그림들과 과일 그림들로 도배된 한국 현대 미술을 보면 얼마나 참혹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도대체 몇 명쯤이나 알까. 아니면 숲 풍경?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한국 미술인 셈이다.


세느강변 산책로

드가(Degas)의 조각 작품들.

조르주 쇠라의 작품들. 어쩌면 후기 인상주의자들이야 말로 현대 추상 미술의 시작을 알린 예술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모네, 피사로, 시슬리 같은 인상주의자들을 넘어서기 위해 쇠라, 시냑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어떤 이는 일찍 죽은 조르주 쇠라를 아쉬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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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ynsea 2008.10.23 16:00 신고

    혼자서 오르세 갔다가 위통이 생겨서 거의 기절해서 일층 로비에 누워 있다시피하다가 온 기억이 나는 군요.. 기절 끝에 황홀경이라니,.. 복통 중 인상파의 거장들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통과 감동의 두가지 감정이 복받쳐서.. ^^;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어떤 세기의 화가가 그 이전 세기나 미래의 세기의 사물을 재현한다는 것, 즉 달리 말해서 과거나 미래를 그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역사적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대적인 것이다. ... 또한 나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며, '현실적이고 실재하는' 사물들의 재현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란, 어떠한 단어 대신에 모든 가시적인 대상으로서 구성된, 전적으로 물질적인 언어이다. '추상적인' 대상,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 쿠르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1861년 12월) 중에서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오랜만에 미술에 대해서 잠시 끄적여 본다. 로만티시즘(낭만주의)의 로만은 로마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로망스(romans)'에 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 부인과 기사의 사랑 따위나 요정과 마녀 같은 것들은 이 로만티시즘 시대(19세기 초반)에 부흥한 것도 이와 연관이 깊다. 요정과 마녀가 중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는 이 서양의 전설은 기독교적이거나 그리스-로마적인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적-북유럽적이며 중세적 전통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역사 속으로 북유럽 게르만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중세가 시작될 무렵이며 7-8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르네상스)로 인해 이것이 다소 위축되다가 로만티시즘 시대에 와서 다시 불꽃을 피우게 된다. 북유럽 신화와 전통에 기대어 있는 '반지의 제왕' 같은 소설도 이러한 로만티시즘의 끝자락에 위치한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것들이 유행의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지성인들이 서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서구 역사 상 최초다. 18세기가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지식인이 정치적 권력을 얻었으며, 이는 종교나 왕권, 혹은 군대에 기대어 이룬 것이 아니라 대중과 저널리즘(* 인쇄술이 얼마나 지대한 공로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에 기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은 '이성'일지 모르나, 그 귀결은 '광기'요, '파시즘'이었다. 결국 유럽은 '합리적 이성'이 현실 정치 상황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끝없는 절망감 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낭만주의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낭만적'이라고 할 때의 그 기분이 현실 앞에서 서서 현실에 대응하며 그것과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곳에 위치한 것도 바로 이 까닭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은 그 절망, 무력감, 광기와 싸우며 그것들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와는 싸우는 낭만주의자였으며, 제리코는 보여주는 낭만주의자였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 속에서 쿠르베는 낭만주의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된다. 즉 신화적 현실 세계(들라크루와)도 아니며, 미쳐버린 현실 세계(제리코)도 아닌, 그냥 너무 평범해서 아무런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향을 '레알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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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6년, 프티-팔레 미술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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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어
캔버스에 유채, 55*89cm
1872년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쿠르베의 '잠'은 사교계나 귀족 고객들의 취향을 고려해 그린 작품이다. 그의 표현력은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예술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 작품 '송어'를 보라. 뭐라고 하기에 다소 난감한 소재의 작품이다.
(미술고교에 다니는 학생이 이런 작품을 그린다면 바로 미술담당 교사에게 핀잔을 듣거나 야단을 맞겠지. 나도 초등학교 때 이런 유형의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상식 이하의) 지적이었는데.)

'송어'를 보면 쿠르베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적절히 당시 지식인들과 미술계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방법을 곧잘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낭만주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였으며, 아카데미 미술과 낭만주의 미술에 파묻혀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식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쿠르베는 낭만주의 시대를 끝내고 근대 예술의 최절정인 인상주의 시대를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쿠르베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면, 마네는 그 현실을 사각의 캔버스에 옮기는 방법에 있어서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다시 한 번 위 쿠르베의 편지를 읽어보자. 그리고 아래 그림을 한 번 보자. 1890년에 그려진 이 그림. 많은 웹사이트와 미술 관련 책에 등장하는 이 그림. 그런데 정작 권위 있는 미술사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 뭐, 이야기 해 봤자, 비난 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이 쯤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것같다. 더구나 이 그림을 대단한 그림인 양, 이야기해대는 무수한 웹사이트의 글쓴이들과 미술 관련 서적에 이 그림을 가지고 뭐라고 해댄 저자들이 솔직히 두렵기도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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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1890년

위 작품이 제작되기 70년 전에 그려진 아래 그림을 보자. 아리 세페르와 장 레옹 제롬이 뭐가 틀리지? 놀랍게도 세상은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놀라운 일이. 예술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소리 따위는 집어치워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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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세페르, 성 루이의 죽음, 1817년

아리 세페르(Ary Scheffer)에 대해 보들레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보들레르는 들라로쉬(Delaroche)를 생각나게 하는 '그토록 불행하고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막연하며 그토록 더럽기 짝이 없는' 셰페르의 그림에 대해 조소한다.
-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p.113

아, 이 글에서 들라로쉬까지 이야기하진 말자. 다만 인상주의 미술가들과 제롬, 아리 세페르, 들라로쉬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동격에 놓고 설명하는 글이나 책이 있다면, 그 책은 형편없는 쓰레기임을 기억해두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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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로그를 돌아다니다보면 윌리엄 부게로를 인상주의 혁명에 밀려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화가로 추켜세우는 포스트를 쉽게 볼 수 있는데요. 부게로의 그림을 보면 지하련님이 말씀하신 아리 셰페르나 제롬이나 부게로와 다를바 없다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습니다. 회화가 이미 모더니즘의 시대로 들어온 이후에도 티치아노나 틴토레토 스타일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神들을 그리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퇴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쿠르베야말로 프랑스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로마 시대의 토가를 체계적으로 벗겨낸 거의 최초의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보들레르는 쿠르베를 일컬어 연미복과 프록코트가 '우리 시대의 필연적인 복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화가라고 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있기에 쿠르베가 가능했고 쿠르베가 있기에 마네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마네에 이르러 비로소 미술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예술을 베끼지 않고 동시대의 삶을 직접 묘사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보들레르를 인용해서, 모더니티란 현재를 영웅화시키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이 더 이상 그리스/로마 시대의 예술을 베끼지 않고 독자적으로 동시대의 삶을 직접 미메시스하는 분기점이 바로 쿠르베와 마네부터라고 생각해요; 보들레르로부터 호의적인 지원사격을 받았던. 운문예술에서 그 자신이 분기점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 퇴행이죠. 아직도 예술에 있어서의 그런 퇴행은 자행되고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현혹되죠.
      아리 세페르는 예수 그리스도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좀 비현실적으로, 비역사적으로, 심지어는 반종교적인 그림인데, 기독교인들은 그 그림을 좋아하는 것같더군요. 부게로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인정받기 어려운 화가입니다. 그런데 블로그에, 그 화가의 그림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걸 보면, 건전한 심미안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되새기게 됩니다.
      푸코가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모더니티란 현재를 영웅화시키는 의지'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 여겨집니다.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끊임없는 변화하는 현 공간 속에서 정직한 한 순간을 담아내려고 하였듯이 보들레르 또한 그의 시를 통해 그 순간의 시심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모더니스트들의 예술의욕일 지도 모르겠네요.

* 2004년 을 내기 전 정리한 노트입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이 때 이후 열심히 공부하질 못했네요.


자본주의의 시대

예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뜬금없이 '자본주의의 시대'라는 소제목이 의아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시대'라는 문구만큼 적절한 것을 찾지 못했다. 19세기 초 낭만주의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멀리 도망치길 원했다면, 그래서 어떤 환상이나 몽상적 세계를 꿈꾸었다면, 19세기 중반의 낭만주의자들은 현실과 싸워 세계의 진보를 이루려고 했다. 이것이 발자크의 세계관이다. 다시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믿는 부르주아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던 시기의 부르주아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19세기 중반 이후 농촌에서의 삶이란 불가능했고 모두 도시로 나오기 시작했다. 빈부 격차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변해갔으며 이 때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세계의 격변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예술은 도리어 퇴폐적이며 시대착오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 양식인 라파엘 전파나 프랑스의 아카데미 화가들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예술 양식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고 있다. 도시가 삶의 중심이 되고 계급 갈등이 심화되는 시기에 혁명의 어두운 기억 속을 헤매고 있는 낭만주의 양식과 아카데미 미술은 적절하게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쿠르베의 작품은 당시 미술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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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urial at Ornans
Gustave Courbet
1849-50; Oil on canvas, 314 x 663 cm (10" 3 1/2" x 21' 9"); Musee d'Orsay, Paris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는 쿠르베의 말은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그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카라바지오가 보여주었던 바의 그 바로크적 자연주의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사실주의(realism)'-다소 그 정의가 애매한-이라고 적었다. '오를레앙의 장례'는 쿠르베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림은 다소 어둡고 분위기는 침울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태도'는 당시 유럽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세계는 낭만주의적 색채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살고 있던 현대적 감수성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것의 귀결이 허무주의이더라도 그것이 등장했을 19세기 중반에는 하나의 혁명이었고 진보였다.


허위와의 전쟁

우리는 진실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을까? 글쎄, 나는 여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모든 진실은 자기자신의 변명이나 합리화를 위해서 존재할 뿐, 실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는 아무런 관심에도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중후반 대도시에 살아가던 부르주아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을 위해서 좋은 것이 '진실'로 여겨지고 있었다. 윌리엄 부게로 같은 아카데미 미술가들이나 라파엘 전파 같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진실을 위해 자신들의 노력을 바쳤다. 그들에게는 칼 마르크스나 찰스 다윈이 이야기한 세계 인식의 극적인 변화를 인식할 여유도 인식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종종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 큰 변혁기에 놓여있지 않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21세기는 19세기의 연속일 뿐이다. 19세기적 삶의 방식이 그대로 21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아직까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계급갈등이 유효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직까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교과서에 싣는 문제를 가지고 종교계가 반발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19세기 이 두 명의 학자가 말한 바 진실이 당시 사회의 근간부터 흔들어놓았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물질적 기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의 의식은 계급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급 구분이 뚜렷해지고 계급적 자각이 시작된다. 하지만 동시에 '물질적 기반에서 그 어느 것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의 유물론적 태도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자신들의 계급적 한계를 뚜렷하게 성찰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허위 의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찰스 다윈은 마르크스의 영향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생각,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한 강한 종만이 진화하여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은 모든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진화의 개념은 근대 기계론과 합쳐져 '진화론적 진보주의'로 변화한다.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부터 그 힘을 뚜렷하게 잃어가던 기독교의 세계를 일거에 날려버린다. 즉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없애고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찰스 다윈의 세계는 진보적인 지식인의 세계이지, 일반 대중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삶에 안정적이고 물질적 기여를 할 때에만 채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의 세계는 거친 정쟁(政爭)의 세계이며 끊임없는 허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세계였다. 이 때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부르주아 세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 의식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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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ejeuner sur L'Herbe
Edouard Manet, 1863
Oil on canvas
214 x 269 cm (84 1/4 x 106 1/4")
Musee d'Orsay, Paris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네의 의도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그에게는 가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쿠르베의 그것이면서 인상주의자들의 그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불경스럽고 지저분한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왜냐면 비도덕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로는 수용하기 힘든 주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술은 도덕적 이념이나 가치를 재현해야 된다는, 그래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일어나야만 할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떤 이념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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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fifre (The Fifer)
Edouard Manet, 1866
Oil on canvas, 160 x 98 cm (63 x 38 5/8 in); Mus? d'Orsay, Paris


이러한 마네의 태도는 위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상주의적인 평면화의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원근법으로 대표되던 르네상스 이후의 환영주의이나 눈속임(Trompe de l'oeil) 경향이 뚜렷하게 후퇴하고 색채로만 이루어진 평면적인 양식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배경 사이에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어 있다. 특히 신발의 처리는 매우 독특하다. 이는 실제 모습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회화적 특징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이제 현실의 재현을 희생하고 회화적 효과에만 치중하는 방향 전환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회화는 원근법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평면화이며 탈가치화이고 반원근법주의이다. 드디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를 그대로 실현하기 시작한다.

예술 의욕과 기술

인상주의는 기존의 모든 예술 양식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예술을 이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의 추상과 기하학주의가 바로 이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언제나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사진과 인상주의의 관계는, 흔히들 사진과 경쟁하기 위해, 또는 사진을 극복하기 위해 인상주의 양식이 등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 의욕(kunstwollen)와 기술(technique)과의 관계이다. 예술에 있어 어떤 기술이나 기법은 예술 의욕에 의해 채용되는 것이지, 새로운 기술이나 기법의 등장이 예술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어떤 변화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양식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예술 의욕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기법이나 기술이 채택되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진과 인상주의는 동일한 예술 의욕을 가진다. 둘 다 모든 사물을 풍경화시키는 양식이며 도시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는 환영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래서 현대로 올수록 이러한 환영주의를 극복하려는 사진가들의 노력이 집중되는데, 후자는 그 시작부터 환영주의를 극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Impression, soleil levant (Impression, Sunrise)
Claud Monet, 1873
Oil on canvas, 48 x 63 cm (19 x 24 3/8"); Musee Marmottan, Paris

모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의 기본 가정은 '자연은 변화한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의 한 순간'일 뿐이다. 그 순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감각 지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길 뿐이다. 이렇게 인상주의는 시작한다.


인상주의: 반원근법주의

존재의 세계에서 생성의 세계로, 원근법주의에서 반원근법주의로,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중심화에서 탈중심화로, 탈가치화로, 그리하여 감각지각에만 의존한 어떤 평면주의로. 인상주의가 예술의 세계에 끼친 영향은 그 이전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의 제시였고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이었고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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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athedrale de Rouen, le portail, temps gris (Rouen Cathedral, the West Portal, Dull Weather) dated 1894, painted 1892 ; Oil on canvas, 100 x 65 cm (39 3/8 x 25 5/8 in); Musee d'Orsay, Paris


인상주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가 바로 모네이다. 모네는 일련의 연작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루앵 대성당 시리즈도 그러한 연작물들 중의 하나이다. 색들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을 뚜렷하게 보려면 약간 거리를 두면 해결된다. 그러니깐 멀어질수록 대상은 뚜렷해지고 명확해진다. 시지각에 충실한 작품들이 보이는 경향이다. 하지만 작품은 평면화되어 있고 캔버스의 중앙이나 가장자리나 똑 같은 색들의 연속처럼 보인다.

연속되어 흘러가는 색채는 르누와르에게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래서 인물마저도, 뚜렷하고 확고한 이념을 주장하던 양식에서 풍경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풍경화가 호소력이 있게 다가온 것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누군가의 내면 세계를 알 수는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꿈꾸는지,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재현할 수는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이 때 모든 인물들은 풍경 속에 파묻혀 하나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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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Terrace
Renoir, 1881
Oil on canvas
39 1/2 x 31 7/8" (100.5 x 81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인물이 하나의 풍경이 된 상황은 결과적으로 20세기의 예술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인간주의나 반지성주의로 이어진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제 풍경화가 예술 장르에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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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nce Examination,
Edgar Degas,
pastel, Denver Art Museum.

드가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도 운동에 매혹된 화가이다. 그래서 그가 발레를 대상을 그렸을 때에는 움직이는 대상을 움직이지 않는 선과 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고전주의적 요구에 충실하였다. 이런 이유로 드가를 인상주의 예술가들 중에서도 '데생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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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e de Paris, temps de pluie; Intersection de la Rue de Turin et de la Rue de Moscou
Gustav Gailleboote, 1877; Paris: A Rainy Day depicts an area of the Batignolles quarter.
Oil on canvas, 212.2 x 276.2 cm (83 1/2 x 108 3/4");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part of the Charles H and Mary F.s. Worcester Fund

인상주의는 현대 도시의 양식이다.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여러 문화를 그대로 옮기는 양식인 셈이다. 이에 많은 예술가들이 동조하였고 이러한 이념을 전파시켰다. 카보유트의 작품은 도시의 한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 하지만 모든 인물은 풍경이 되었고 보들레르가 말한 바 있는 '산책자(Flaneur)'나 '현대성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또 다른 예술의 절반은 바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현대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바로 인상주의 예술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세잔의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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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1904-06 ; Oil on canvas, 66 x 81.5 cm (26 x 32 1/8 in); Private collection, Switzerland; Venturi no. 802


인상주의 초기부터 세잔은 참여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킨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들의 규칙이었고 기하학이었다. 그는 인상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낸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생 빅투와르 산 연작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감각 지각에 의해 인식되는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어떤 확신을 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의 양식은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기하학주의로 흐른다. 이러한 그의 방향은 20세기 초의 현대 미술을 결정짓는다. 추상미술은 세잔 이후에 본격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세잔의 작업은 현실 속에서, 삶 속에서 어떤 확신을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다. 인상주의자들이 인물을 풍경 속에 가두었을 땐 인간에 대한 혐오가 밑에 깔려있는 것이라면, 세잔이 자연 풍경 속에서 기하학을 발견해내는 것은 적대적 세계라는 신석기 시대에 나타난 바 있는 기하학주의의 반복인 셈이다. 그리하여 신석기 시대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기하학과 추상의 세계가 20세기 예술을 물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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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잔에 대해 잘 보았습니다.
    입체파의 그림처럼 풍경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입체일테니까...
    더 사실적인 것일텐데 낯설군요..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말이 성립하는지도 의심스럽네요)

    • 세잔의 고전적 화풍은 이전의 고전적 화풍과는 본질적으로 틀립니다. '내면의 고전주의'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 속의 고전주의적 기반(기하학적인 원천)을 찾아갑니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고전적 모더니스트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실험된 것이기도 합니다. 의식의 흐름이라든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나 피카소의 입체파나 칸딘스키같은 추상표현주의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나타납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입체'라는 단어보다 '기하학적'라는 단어가 세잔에게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네요. 세잔의 문제의식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기하학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으니깐요. 삼각형, 사각형 같은.

  • (잘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가슴에는 와 닫네요.
    세잔느의 경지라고 할까요.기학학적 표현말이에요. 그것을 이해 못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입체가 기하학적 요소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체라는 표현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기하학적 요소에서 사각형은 넣고 원기둥과 같은 입체를 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네요. 세잔느를 큐비즘, 입체파로 분류하는 것도 보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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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이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이들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다. 시간 따라 변하는 색채의 현란함, 그 현란함이 가지는 찰라의 쓸쓸함, 그리고 쓸쓸함이 현대인들의 피부를 파고 들어 삶의 양식이 되었음을 깨닫게 해준 이들은 인상주의 이후의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본래적인 것이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견고한 피부를 만들고자 한 이들이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이라면, 그 쓸쓸함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순간의 희열 속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이 후기(post)의 모더니스트들이 아닐까.

고객사를 가다 오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붉은 잎사귀를 찍는다. 하나는 내 혓바닥 같다. 다른 하나는 누구의 혓바닥일까.

지금 나는 누군가의 혓바닥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붉은 혓바닥 하나가 붉은 혓바닥 하나를 기다리는 가을 풍경이란, 처참해보인다. 단풍은 원래 그런 빛깔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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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 라파엘전파, 사실주의, 인상주의.

19세기를 특징짓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찰스 다윈'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19세기의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찰스 다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19세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속에서 주인공의 이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다윈일 정도이니, 그가 19세기 후반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치즘도 다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는 여러모로 양 극단을 달리는 시대이다. 이러한 분열의 증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영국이다. 영국 런던의 뒷골목은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 같은 집에서 살며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만연하고 심심치 않게 근친상간이 일어났지만, 러스킨과 라파엘전파는 고매한 도덕주의자, 자연주의자,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라파엘전파를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조아가 가지는 기만적인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라파엘전파의 여러 화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바, 몇몇 미술사가들이 공공연하게 로제티, 번 존스, 밀레이에게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몇몇 작품 속에서 보이는 기만적 태도에 대한 반응을 주목할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예술가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회적 발언이 하나의 Movement가 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며 하나의 학설이 되는 시기는 19세기가 최초이다. 이러한 일은,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때문이다. 18세기말 패트론 제도가 확실하게 사라지자,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시장에 내다놓아야만 했고 시장의 질서는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술적 성취와 시장 속 가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예술가들 중 한 부류는 계량적 논리로 무장한 시장 속에서 나의 예술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공공연하게 떠들고 자신의 예술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가에 대한 논리를 추상적이며 정신적인 어떤 것들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며, 또다른 부류는 시장의 잘못된 점을 공공연히 떠들고 이 세계의 허위와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예술가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러니 자본주의 발달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19세기 낭만주의나 이후에 전개되는 사실주의, 인상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찬사는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이 미술 양식이 얼마나 불길하며 얼마나 절망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이 미술 양식이 속에 숨고 있는 바의 세계란, 인간이 사라진 세계이며 우리의 지성이 우리의 삶을 해명해내지고 못하고 외부세계란 그저 눈의 망막에 비친 감각적 현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는 너를 모르고 너 또한 나를 모른다는, 고독하고 쓸쓸하며 지친 '도시산책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미술 양식이 보여주는 비인간주의야말로 절망에 내몰린 일군의 예술가들이 쓸쓸히, 냉담하게 창 밖 풍경을 아무런 열정이나 정감없이 바라본다는 사실을, 이미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절망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산책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벤야민이 주목하였지만, 이 산책자의 실체란 익명의 대중을 걸어가다가 이 세상에 날 아는 사람, 날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고 말하곤 한강의 다리나 어느 지하철 역사 안에서 강물 속으로, 달려오는 전철 앞으로 몸을 던지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이야기해주지 못한다. 왜냐면 보들레르나 벤야민이나, 둘 다 19세기적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거대한 실체, 통합 이론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보편개념이 사라지고 초월적 실체가 사라진다는 건 허무와 절망 속으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던진다는 것임을 인상주의자들이 이야기해주고 있지만, 그것의 허무, 절망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상주의 예술가들을 높게 평가하면서 동시에 부게로나 제롬과 같은 얼치기 키치 예술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책 속에 담고 라파엘 전파의 기만적인 양식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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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 1862
James McNeill Whistler

지금 보면 무척 낡고 고루하며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이 정도 분위기의 그림이 보수적인 계층의 비난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유명세를 치루었다.

휘슬러는 인상주의 친구들과 친했지만, 그의 화풍은 인상주의보다는 더 과거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분명 그의 고향, 미국적이다. (* 우리는 이 때위싱턴이 신고전주의적인 건물들로 이루어져있음을 떠올려야할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은 신고전주의 열풍으로 떠들썩했다.)

여하튼 휘슬러는 적당하게 19세기 중반적이었다. 이후의 혁명적인 양식에 속하지도 못했으며 차라리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전의 양식에 더 가까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봐도 그의 그림은 신교적이다. 그래서 유럽의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싫어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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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moiselle Romain Lacaux
1864.
Oil on canvas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USA
(* 로맹 라코 양의 초상)
 
 
르누와르의 초기 작품이다. 인터넷을 뒤져 어렵게 구한 이미지이다. 개인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르누와르의 작품들(* 빛들이 요동치는)보다 비교적 초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데, 이 작품 속에서 르누와르가 존경하던 앵그르와 코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은 초상화 장르의 관례를 존중한 것으로 보여진다. 옷의 주름 처리나 소녀의 초상 뒤로 보이는 배경의 처리에서 르누와르의 그림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참고로 르누와르는 인상주의에 속하는 예술가이며 젊은 시절 끌로드 모네와 같이 살기도 했다. 그리고 같이 살롱전에 낙선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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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Boy with a Cat
1868-69
Oil on canvas
43 3/4 x 26 1/4 in (124 x 67 cm)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을 보면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약간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은 르누와르의 초기 작품으로 고양이를 스다듬는 소년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앞의 꽃무늬 천이나 고양이의 처리는 무척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소년의 누드는 무척 이국적이면서 애로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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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기원전 만 여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아직까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술사 최초의 '자연주의'양식이며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진정한 선조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깊은 동굴에서, 그 어둠과 싸우며 감각에 충실하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싸운다'는 것의 의미. 현대 예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유는 예술의 역사가 운명과 싸우고 현실과 싸우고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위한 노력의 역사임을 현대 예술가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표현하고 있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앞으로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것인가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만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 대답을 구할 수 있다. 경박한 영상들이 범람하고 스타는 제조되며 정치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아예 정치에 무관심해져 버리며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도 자기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온통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뿐인 시대.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비된 물품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대.


최근 '몸학'이나 'body politics' 등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소망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마 전의 베이컨이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자한 바는 '육체'란 삶을 냉정하게 꾸려나가게 하는 차가운 이성에 적대적인 것, 그래서 버려야만 하는 흉칙한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즘 예술에서의 '육체'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모던적인 뒤샹의 <주어진Etant donn s>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브 클라인은 여러 '해프닝'들을 통해 우리 육체를 보다 직접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또한 우리 육체의 움직임을 사각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차가운 이성의 계산 대신 뜨거운 육체의 분수같이 쏟아오르는 열정이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이 전적으로 감각으로 외부의 사물을 바라볼 때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탈가치화', '탈중심화'이듯이 현대 예술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서로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수 없는, 모나드(monad)처럼 각각 독립된 '육체'로만 존재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개개의 독립된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양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예술의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규범이자 신념으로서 '고전주의'이 가장 확실하게 무너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신숭배(fetishism)'에 대한 경고를 아직까지도 듣고 있지만, 누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승리의 깃발 아래 있으며 돈은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된 지금, 누가 진정으로 한 개체의 진실에 대해 신경을 써주겠는가?


최근의 '몸(육체)'에 대한 관심이 뜬금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 삶의 진실과 허위에 대한 고민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가장 진실한 '육체'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의 끝은 허위적인 '사랑' 대신 진실한 '섹스'를, 구역질나는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진실한 '개인적 가치'를,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 세기의 예술 양식이 어떤 모습일까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번개와 천둥소리에 겁을 먹던 시대가 있었고, 하루 아침에 고전 시대의 문명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대가 있었으니,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낯선 것은 아닌 셈이다.

- 1999년에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기고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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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춤, 데생>>, 폴 발레리(지음), 김현(옮김), 열화당



1.
"나는 그림보다 더 지성적인 예술을 알지 못한다."
- 90쪽

이 한 문장으로 발레리-그의 '드가'와 함께-는 '고전주의'를 그의 독자들에게 알린다. 그래서 자신의 지성을 연마한 이들에게만 (발레리의) 드가는 보이게 될 것이다. 이 '참혹스러운' 진실은 '현대 예술가들이 왜 자신의 지성을 버리고 감각에 의존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지름길이다.

"우리들의 사고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형태를 취할 때, 생명의 참된 본성을, 진화 운동의 깊은 의미를 표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 이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부분은 전체와 비등하다든가, 결과는 원인을 자기 속에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든가, 해변에 버려진 자갈은 그것을 밀어올린 파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든가 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실은, 우리들의 사고 범주 속에 일(一), 다(多), 기계적 인과, 지적 합목적성 등 어느 하나도 생명이란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도 곰곰히 느끼고 있다."
-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서문에서.

베르그송의 이 문장들은 인상주의 미술이 인간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자신의 지성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 필요가 있는 법이다. 발레리가 낭만주의를 이해하면서도 고전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이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2.
플라톤이었던가. 우리들의 이 언어, 바로 지금 그대가 읽고 있는 이 글자마저도 (실재의) 그림자임으로 우리들이 말하고 싶었던 그 무언가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플라톤에게 있어서 의도는 '이데아'를 향해 있지만, 여기에서 현대가 마주하고 있는 '기표와 기의의 문제'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소쉬르가 이 '기표와 기의의 임의성'을 분명한 어조로 정의 내렸을 때,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언어의 불신'은 그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그렇다고 철학적 엄밀함의 언어도 아닌, 모호하고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그 언어는? 현대의 심미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3.
화가에 대해 가장 진실한 어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시인일 것이다. 보들레르가 들라크루아를 이야기하듯이 발레리는 드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연적인 포착'에 불과한 것이다.

"묘사란 일반적으로, 위치를 바꿔 놓아도 좋은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방을 그 순서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련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있다. 시선은 원하는 대로 방황한다. 이런 방황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진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 116쪽


4.
"바로 그거군! 전화란! 종이 울리면 자네가 가는군."라는 말로 발레리의 드가는 우리들의 눈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다.

"드가는 언제나 혼자 있다고 느꼈고, 모든 형태의 고독 속에서 혼자 있었다. 성격 때문에 혼자였고, 특출난 그리고 특이한 본성 때문에 혼자였고, 성실성 때문에 혼자였고, 오만한 엄격성 때문에, 굽히지 않는 원칙과 판단 때문에 혼자였고, 자기 예술,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그가 요구한 것 때문에 혼자였다."
- 136쪽


5.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누군가의 몸짓이나 손짓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대신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발레리의 '드가'는 드가 자신이면서 동시에 발레리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진짜 모습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타인들 틈 속에 있는 것처럼 발레리도 드가도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라캉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드가가 무희를 그리면서 무희보다도 바닥을 더 넓게 그리는 이유와 같다. 바로크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빛 나는 중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풍경화로 변한다. 푸생과 클로드, 콘스터블과 터너에 이어 우리는 이 흐름을 드가에서 만난다. 풍경화가 끝내 '기하학주의'로 가 닿는 것은 원근법주의에서 시작한 근대 회화가 반원근법주의로 가는 필연적 귀결인 셈이다.

원근법주의에는 그 속에 시선의 중심인 인간(이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회화에서의 '풍경'도 실은 풍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장식적이며 연극적인 자유를 가지고, 나무, 작은 숲, 시내, 산, 교회 건물을 이용한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몸을 맞댄다. 그들은 점점 아틀리에서 일하지 않는다. 차츰 들판에서 일한다. 그들은 사물의 견실함 혹은 유동성과 싸운다. 어떤 사람들은 빛을 공격하고, 시간을, 순간을 잡으려 한다. 이미 끝난 형태를 그것을 덮는 반사광, 섬세하게 조합된 스펙트럼의 요소들로 대치시키려 한다. 어떤 자들은 반대로 그들이 보는 것을 아무렇게나 만든다. 이렇게 해서 풍경에 대한 관심은 점차로 방향을 바꾼다. 행동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의 종속물로서, 풍경은 멋있는 것이 있는 장소, 몽상의 거주지, 방심한 눈의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는 인상(印象)이 승리한다. 질료와 빛이 지배한다.'(112쪽에서 113쪽)


6.
'진실은 우연임으로' 몇 천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헤라클레이토스는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우리는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이 강물은 이 순간, 이 찰라를 지나고 나면 영원히 다시 담그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발레리는 헤라클레이토스 대신 제논을 택한다. 이 놀라운 역설이야말로 내가 발레리를 찬미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다. 제논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나는 화살은 정지해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화살이 아니라 '화살을 분석하는 인간'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 화살을 실제로 날고 있지만, 그것을 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날지 않고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가, 춤, 데생』이라는 제목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있다.

드가의 말: "데생은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를 보는 방법이다."

이 문장에서 '보는'이라는 동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성은 아닌 '감각'이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강물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제논은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어함을 눈치채어야만 한다. 현대의 반인간주의는 보다 진실한 형태의 인간주의이다. 풍경 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그 뚜렷함을 상실하고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은 다윈의 말대로 우리가 원숭이들의 후예임을 인정하는 과정일 뿐이다. 발레리의, 그리고 현대의 고전주의는 이 이후의 일이다. 우리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진실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밀려닥치는 거친 물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유일한 것을 찾는 '데카르트적 모험'을 새롭게 진행시킨 것이다.





드가.춤.데생 - 10점
폴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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