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햄릿, 세익스피어

지하련 2009. 6. 18. 08:39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지음), 김재남(옮김), 하서



시청률의 노예가 되고 하나의 광고라도 더 받아야 하는, 처량한 TV 드라마의 시대에, 몇 세기가 지난 영국 작가의 희곡을 읽는 건, 참으로 터무니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은 셰익스피어를 읽을 만큼, 고상하지도 않고 더구나 여유롭거나 한가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면, 그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끝까지 살아남아 이 비극의 전말을 후세에 남기게 될 호레이쇼에 대해 햄릿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햄릿
여보게 호레이쇼, 나는 스스로 영혼 속에 분별력이 생겨서 인간의 선과 악을 가릴 줄 알게 된 때부터 자네를 영혼의 벗으로 꼭 정해놓고 있네.
자네만은 인생의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운명의 신의 상과 벌을 똑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이었네.
감정과 이성이 잘 조화되어 운명의 손가락이 노는 대로 소리를 내는 퉁소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지.
정열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다니려네.
자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네.
- 93쪽


아마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햄릿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극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 시간 안에 무대 위에서 모든 것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희곡은 스토리를 질질 끌지 않으며, 사건과 인물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갈등의 끄트머리에서 이 이야기의 전말을 보여주며 끝난다.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 깊은 밑바닥을 드러내며 몰락해가며 희곡은 끝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드러내며 사건을 종결시키는가, 정해진 시간 속에 인물들의 갈등을 어떻게 첨예화시키며, 주요 인물의 도덕성과 고결함을 드러내는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언어를 조탁하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햄릿 일가의 비극적인 상황도, 햄릿과 오필리어의 사랑도 아니다. 쓰레기같은 스토리, 구차한 감정들로 이루어지는 갈등, 인생의 고결함이라곤 전혀 없는 TV 드라마의 시대에(* 드라마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조차 부끄럽기 그지 없는), 원래 드라마란 이런 것임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라파엘 전파의 한 사람인 밀레이는 죽은 오필리어를 그린다. 낭만주의 말기,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 오필리어는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잡았음에 분명해 보인다.


왕비
시냇물가에 하얀 잎사귀를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치며 비스듬히 서 있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그애는 그 가지에다 미나리아재비니, 쐐기풀이니, 실국화니, 자란 등을 잘라서 괴상한 화한을 만들지 않았게니.
이 자란을 무식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얌전한 아가씨들은 사인지라고들 하더구나.
아무튼 그 화환을 늘어진 버드나무가지에 걸려고 올라가던 참에,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부러져 화환과 함께 사람은 시냇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지. 그러자 옷자락이 활짝 펼쳐지고, 그애는 마치 인어처럼 물에 둥실둥실 떠서 옛날의 찬송가를 토막토막 부르는데, 절박한 불행도 아랑곳없이 마치 물에서 자라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지.
그러나 그게 오래 갈 리는 없고, 옷에 물이 배어 무거워지자 그 가엾은 것은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끊어지고 말았지.
- 159쪽 ~ 160쪽




John Everett Millais,  Ophe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