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misc.. 0909

지하련 2009. 9. 9. 18:46



정운찬 총리 카드는 역시 정치판은 흥미진진하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다만 이 흥미진진함의 주인공이 현직 대학 교수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2학기 때 담당하기로 예정되었던 과목들은 줄줄이 폐강되었고 학생들의 푸념은 들리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나라는 놀랄 만큼 달라졌다. 더 웃긴 것은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던 두 전직 대통령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그 어떤 불평불만도 제기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도리어 불평불만을 제기하려고 하면, 나에게 '조심해라'고 충고한다. 

달라졌다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권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을 궁지로 몰고 소통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 힘을 통한 누르기가 많아진 듯하여 걱정스러울 뿐이다.


어쩌면 '합리적이다'라거나 '논리적이다'라거나 하는 단어 따윈 더러운 위선과 똑같은 것은 아닐까. 차라리 '그 때 그 때 달라요'(Ca de'pend)이 낫지 않을까. 그 때 그 때 다르니,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지 않은가. 과연 신뢰할 이는 없는 걸까. 

모든 이론과 학설은 그 시대의 부산물이며 동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합리성 따윈 존재하지 않고 그냥 약속하면 되는 것이다. 일종의 랑그다. 그것도 시대마다 변하는 랑그다. 그러니 말 없는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 마르크스 옆에서 기도하는 키에르케고르가 있듯, 당신의 반항과 열정, 자유를 몸으로 보여달라는 까뮈나 싸르트르 옆에 웅크린 채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오늘 메일로 수신된 다산포럼의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요즘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여교사 성희롱 동영상 뉴스 사이로 2PM의, 탈퇴한 리더 재범이 미국 공항에 내려 걸어가는 사진이 보였다. 도대체 재범을 공격했다는 '네티즌'은 누구인가? 온라인 속에서 내가 아는 네티즌들은 재범을 도리어 이해할 수 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아는 네티즌과 연애 기사에 나온 네티즌은 다른 네티즌인가? 이 나라 언론 기사를 지배하는 네티즌이 누구인지 나에게 가르쳐줄 기자는 과연 있는가? 혹시 맨날 네티즌 핑계나 되는 기사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자의 역량 부족은 아닐까?
 
사람들은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무 생각도 없겠지. 뭔가 일이 터지고 난 다음,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또 그 일이 터졌을 그 때 뿐일 것이다. 그리고 잠잠해지겠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그리고 언젠가 끓게 될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오늘 읽은 아래의 글은 슬픈 우리 나라의 자화상처럼 읽혔다. 오랜만에 다산포럼의 글에 링크를 건다.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고 귀를 막고 있으면 안 된다. 세상은 다양한 가치와 기준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서로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하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동들이 필요한 것이다.

법과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 김정남(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