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느 사적인 일요일

지하련 2010. 11. 7. 10:55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다. 겨우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드립용으로 잘게 부서진 브라질 산토스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린다. 물 끓는 소리, 위로 향하는 수증기, 떨리는 손, 돌보는 이 없는 듯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엉켜 어느 일요일 아침을 구성하였다.

요즘 힘겹게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러한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한 사적 인간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마치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사적인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타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중요성도 없으며,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11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논의는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다. 그리고 여느 문명의 말기마다 그랬듯이 사적 영역의 강화가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적 인간의 출현은 그 동안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강화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무너지는 공적 영역 앞에서 현대 학자들의 담론은 무력하기만 하게 보인다.

세상을 길게 보면, 어느 것이 문제인지 알게 되지만, 그 해결책은 터무니 없게 거대하거나, 실현불가능하고, 또는 우리들에게 참혹스런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탁상공론으로 끝나거나 어느 책 말미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 재발견되어 빛나는 유행이 될 것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무겁고 딱딱한 커피 향 속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오가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