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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Woman on the Edge of Time 1권, 2권
마지 피어시 Marge Piercy 지음, 변용란 옮김
민음사 모던 클래식 031, 032
1.
이 책은 민음사 홍보기획부의 정은년 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그것이 작년 여름(8월)이니, 벌써 몇 달이 지난 것인가! 책은 완독한 것은 올해 2월이었다. 책을 받고 몇 달은 밀린 책 읽기에 여념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 소설 읽기는 어수선한 일상의 삶에 의해 방해 받았다. 겨우 소설을 다 읽었지만, 그 이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렇게 서평을 올린다. 이 소설에 대한 서평은 자신 없고 깊이를 가지기엔 내가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여러 문헌을 뒤져가며 연구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작은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2.
소설을 다 읽었지만, 이 '투박한'(*) 소설은 너무 현실적(realistic)이었고 여성적(feministic)이었으며, 혼성 장르였으며, 정신분열적이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소설들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이는 소설적 재미와 무관한 것이다. 마치 마지 피어시라는 작가의 약력처럼.
대학 졸업 후 비서, 계산원, 강사 등 여성 임시직 노동자의 생활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 간 그녀는 계급과 여성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 뉴욕 지부장을 맡아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한편으로 ‘빠른 몰락’(1969), ‘독수리를 춤춰 잠들게 하라’(1970)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에 케이프코드로 이주한 이후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랫동안 동료로 지낸 아이라 우드와 1982년에 결혼했다. 희곡 ‘마지막 백인 계급’(1979)을 공동 집필했던 두 사람은 소설 ‘폭풍의 물결’(1998) 역시 함께 작업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였던 ‘입대’(1988)을 비롯하여 ‘한줄기로 땋은 삶’(1982), ‘여자의 갈망’(1994) 등 여러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회상록 ‘고양이와의 동침’(2002)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 그녀, 그것’(1991)으로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하는 아서 C. 클락 상을 받기도 했다.
피어시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치적 작가로 자신을 정의한다. 지금까지 소설 열일곱 권과 시집 열일곱 권을 발표한 그녀는 여전히 열렬한 사회운동가이자 작가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 위의 글에서 '투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소설의 극적 재미나 사건의 진행이 독자의 몰입을 위해 구성된 것이기 보다는 현실과 이상의 대비를 위해, 그 대비 사이에 여백(코니의 환상으로 여기게 하게끔)을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극적 소설에 비교한다면 소설적 재미는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투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투박함은 마지 피어시의 여성주의(페미니즘) 소설이 가지는 또다른 매력은 아닐까.
3.
19세기 후반 Elizabeth Stuart Phelps와 Mary E. Bradleydhk 같은 작가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는 20세기 초 Charlotte Perkins Gilman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일군의 페미니즘 소설가들이 등장하는데, 마지 피어시, 르 귄 Ursula K. Le Guin, 사무엘 드레니 Samuel Delany, 조안나 루스 Joanna Russ 등이었다. (여기에서 인용된 작가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준비해볼 생각이다. 마지 피어시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주목할만한 여성주의 소설가들, 특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대한 풍부한 표현들로 채워나간 작가들이 꽤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실 비판적인 경향의 소설들은 그 소설이 지닌 경향성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든지(조지 오웰의 1984), 유토피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즘 소설가들에게서는 유토피아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경향은 20세기 후반으로 올수록 디스토피아적 색채를 띠게 되는데, 마지 피어시의 작품도 여기에 속한다.
4.
여 주인공 코니는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정부의 복지 정책마저도 그녀의 일상과 삶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루시엔테일 것이다. 먼 미래에서 온 루시엔테는 소설 속에서 그것이 실제 사실인지, 아니면 코니의 환상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묘사로 인해 그것의 사실성이 드러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똑같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미래의 유토피아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경향주의 소설이 자주 취하는 방식이지만, 그 방식의 상투성으로 인해 소설이 지닌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방식은 정신병이라는 교묘한 장치에 숨겨지고 먼 미래와의 교감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SF적 색채를 띤다. 하지만, 루시엔테가 사는 미래에도 전쟁이란 존재하고 그 곳에서 코니는 고통을 받는다. 코니의 시선은 그녀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과 끊임없이 어긋나고, 독자는 외부의 공간에서 코니를 지켜볼 뿐이다.
소설은 환상과 현실, 현재와 미래를 오가고 페미니즘과 SF 소설을 넘나든다. 장르적 한계를 넘어 성적 한계마저도 뛰어넘는다. 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하지만, 마지 피어시가 취하는 전략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쓸쓸해지고 슬퍼지는 이유는 변두리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을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5.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때때로 무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현실을 드러내는 일도 고통스럽지만, 현실로 드러난 소설을 읽는 독자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타인의 일로 치부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고통은 탈색된 채 TV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위를 떠돌고, 고통은 언급되지 않은 채 사라지는 침묵의 바다에 속하게 되었다.
마지 피어시의 작품이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현실을 드러내고 싸우는 문학적 방식의 탁월함에 있을 것이며,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소설 읽기는 고통스럽고 재미없으며 종종 지루해지기 까지 하다. 하지만 현실을 이야기하는 현대적 방식의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 소설은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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