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사물들에 대한 사랑, 혹은 숨겨진 외로움

지하련 2011. 3. 24. 19:26


하루의 피로가 몰려드는 저녁 시간. 밖에는 3월을 증오하는 1월의 눈이 내리고 대륙에서 불어온 바람은 막 새 잎새를 틔우려는 가녀린 나무 가지에 앉아 연신 몸을 흔들고 ... 어수선한 세상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고, 밀려드는 업무에 잠시 손을 놓고 ...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 오는 3월의 어느 저녁.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사물들에게 바치는 송가



모든
사물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들이 정열적이거나
달콤한 향내가 나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이 대양은 당신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추들과
바퀴들과
조그마한
잊혀진
보물들.
부챗살 위에 달린
깃털
사랑은 그 만발한 꽃들을
흩뿌린다.
유리잔들, 나이프들
가위들…
이들 모두는
손잡이나 표면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스쳐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망각의 깊이 속에
잊혀진
멀어져간 손의 흔적



나도 사물들에게 몰두할 때가 있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였다. 외로움의 강물이 내 몸에 흘러넘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거친 살갗 사이로 희멀건한 물기가 흘러나왔다. 내 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여있는 샘이 되었고 그 위로 쓸쓸한 음악이 흘렀다. 

파블로 네루다가 외로웠을까. 모든 사물들에게서 흔적을 찾는다. 흔적을 간직하며 애무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노래한다. 사물들에 대한 사랑을. 

아마 17세기의 이 벨기에 화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Adriaen van Utrecht (Flemish painter (b. 1599, Antwerpen, d. 1652, Antwerpen))
Vanitas Still-Life with a Bouquet and a Skull
c. 1642
Oil on canvas, 67 x 86 cm
Private collection


해골과 꽃다발,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그 흔적을 지친 먼지들로 숨기는 사물들을 위트레흐트(Utrecht)는 사랑했는가 보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뒤돌아보며, 시간의 흔적들을 숨기는 사물들 속에 자신의 외로움을 투영시킨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위트레흐트가, 그리고 젊은 날의 내가... 그러다가 어느 날 사물들에 병적인 집착을 드러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눈이 내리는 3월의 저녁은 길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