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Creep

지하련 2003. 12. 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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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영혼들의 슬픔을 먹고 자란다.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나고, 그렇게 계절이 수십 번 바뀌는 동안 영혼들의 슬픔은 줄어들지 않고 시간만 앞을 향해 간다. 현실은 과거가 되고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얼마 전에 읽었던 어느 글 속에서 종이에다 적은 연애 편지가 오래 간다며 사랑을 이야기할 땐 연애 편지를 쓰라고 했다. email은 어딘가에 저장시켜놓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디스켓도 영원하지 못하고 다른 어떤 매체보다 종이가 낫다고.

사랑. 참 좋은 단어다. 하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자에겐 축복받은 단어이고 지금 사랑을 꿈꾸는 자에겐 희망의 단어이지만, 지금 사랑을 잃어버린 자에겐 죽음과 절망, 두려움의 단어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가는 것.

일이 있어 홍대 앞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술 생각이 났다. 예전엔 술을 마시면서 문학 이야기를 하고 음악 이야기를 하고 화가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이 꽤 많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 나니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 낮에 종일 클래식만 들었는데, 정말 좋았다. 차이코스프키, 베토벤, 베르디, 포레.... 그렇게 듣다가 초겨울의 추위 속으로 모험을 감행했다. 거리로 나선다는 건 내가 혼자임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지하철 2호선 그 빽빽한 틈 속에 내가 아는 이라곤 한 명도 없다는 것. 내 이름을 그들이 모르듯이 나도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 그러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지하철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러면 그/그녀의 몸뚱아리는 차가운 금속체들 밑에 깔리고 빨간 액체가 흘러나오고 단단했던 뼈가 으깨지고 ... 그럼 그/그녀의 영혼을 차분한 움직임으로 차가운 금속체 밖으로 나와 살짝 미소를 보이곤 땅 위로 올라가겠지.

슬픔은 나의 영혼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차갑고, 그만큼 움추려들었으며, 그만큼 폐쇄적으로 변했다. 내보이는 건 가식적인 몸짓들. 그리고 시간은, 저 화려한 날개를 가진 시간의 여신은 내 영혼을 궁지로 몰아가며 슬픔을 짜내는 듯하다. 그렇게 단단해지는 내 영혼의 갑옷이여. 내 차가운 얼굴이여. 내가 나를 향해 키워가는 역겨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