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하련 2012. 5. 13. 11:27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 10점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인간사랑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La haine de la democratie 

자크 랑시에르(지음), 허경(옮김), 인간사랑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 정체가 모호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실은 '민주주의'라는 게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민주주의의 해악’을 드러내며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유럽 지식인들을 향해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그 가치’를 말하기 위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향한다.



혈통에 기초하는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범죄성은 우선 정치 차원의 범죄인 것이다. (83쪽)


민주주의는 우선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96쪽)


즉 민주주의는 혈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위계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03쪽)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어져 왔는가를 되짚으며, 민주주의의 현재를 묻는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 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 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111쪽)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민주주의 앞에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옮긴다. 왜 민주주의가 문제시되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가를 비판적으로 옮기면서 도리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묻는다. 



근대 민주주의는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성인 무한성의 법칙을 통해서 정치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40쪽) 



결국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혈연이거나 정치경제적인 부라든가, 물리적인 힘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뜻이 반영되는 어떤 정치체제-민주주의-일 것이지만, 그것은 기존 질서에서 보자면 정치적 범죄이거나 혁명이고, 현재에서 보자면 '이기적인 개인들의 소비적 차원에서의 평등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정치의 개념이 상실된 상태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기를 바라지 않는 "지배체제"라는 말을 대신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라져버린 '이중적인 주체'(지배체제를 감수하는 동시에 고발하는 개인)을 대신하여 나타난,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사악한 주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주체적 개인의 혼합된 모습을 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그 체제에 사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적 인간은 다름 아닌 팝콘, 리얼리티쇼, 안전섹스, 사회보장, 차별화의 권리, 반자본주의 환상 또는 대안적 세계화의 환상 등을 추종하는 얼빠진 젊은 소비자인 것이다. (183쪽)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란 어쩌면 책에서만 나오고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어떤 이상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정치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한'다고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결국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어떤 체계가 된다. 



민주주의와 그것의 본질인 제비뽑기라는 스캔들은 '추첨'이라는 자격이 '자격 그 자체가 없는 자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의 통치는 종국에는 우연성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폭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이다. (107쪽)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치부이거나 약점, 모호성'이 되며,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된다. 


역자는 유럽적 상황과 한국적 상황이 다르다고 말하나, 글쎄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득을 본 것은 소비주의이지, 정치적 환경의 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주화가 진전되다가 도리어 '반-민주화'적 경향이 생기고 있으며, 그 경향은 랑시에르가 말하듯 소모적이며 판단내리기 어려운 반-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자신이 폭행의 피해자라고 하여 프랑스 사회 전체를 숨막히게 만든 여인; 학교에서 이슬람교도의 머리 가리개 벗기를 거부하는 중, 고등학교의 여학생들; 항상 적자 상태인 사회보장 보험;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바칼로레아 시험 주제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대체한, 보다 근대적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 기존의 연금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시위하는 봉급생활자들; 빈곤층 출신 학생들 대상의 입학 할당제를 도입한, 전문 엘리트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grande e'cole);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쇼; 동성인들 간의 결혼과 인공수정을 통한 인간 생식, 이상에서 열거한 것들보다 더 잡다한 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이 모든 징후는 동일한 병적인 증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근대적 대중 사회 속의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이다. (19-20쪽) 



정치 체제로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으나, 근대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각 개인의 존엄성을 단순 교환가치로 전환시켰으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여러 가지 자유를 하나의 자유, 즉 무자비한 상업적 자유로 대체했다.'(54쪽) 그리고 그 상업적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자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변'을 훑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킨다. 실은 민주주의란 어떠어떠한 것이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 소비 사회의 여러 가지 해악을 민주화의 결과물로 곡해하고 있는가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분류를 따지자면, 꽤 어렵고 전문적인 '정치 철학 서적'에 속하겠지만, 책을 다 읽은 후의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나 민주화 같은 단어를 일상 생활에서 한 번이라고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acte)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사상의 힘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자들에게 충분히 공포감과 증오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쪽)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