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지하련 2014. 10. 5. 08:08


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