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가

술병이 있는 자화상, 뭉크

지하련 2022. 7. 30. 12:11

 

턱 밑까지 더위가 올라와 얼굴을 천천히 물들인다. 피곤한 피부 위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저주의 언어들, 혹은 절망, 아니면 실패자의 체념 같은 것. 발터 벤야민이었던가. 우리가 희망을 얻는 것은 과거의 불행했던 사람들로부터라고. 

 

 

<<절규>>, 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저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참 불행하게 살다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에드바르트 뭉크(노르웨이, 1863-1944). 하지만 의외로 평안한 노년을 보냈다. 몇 번의 사랑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낙담하지 않고 평생 혼자 지내며 작품활동을 하며 보냈다. 그리고 후기에 그렸던 작품들 대부분을 기증하여 뭉크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우리에게 알려진 널리 그의 작품들을 보자면, 참 불안하고 슬프고 절망적이긴 하지만 뭉크는 다행히도 그 젊은 날의 불안, 격정, 절망, 슬픔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텅빈 술병을 뚫어져라 보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하긴 그녀와의 마지막 자리, 비워져 가는 커피잔이나 술잔을 보며 불안, 절망, 슬픔에 빠졌지. 줄어드는 그 액체의 부피만큼, 내 두려움도 함께 커지긴 했다. 그녀의 마지막 전화가 오지 않은지 몇 주, 휴대폰의 배터리 칸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강박증이 생기기도 했다.

 

1906년 독일 바이마르, 그는 알콜에 빠져 지냈다. 배경은 뒤로 밀려나가고 뭉크는 앞으로 다가오면서 술병과 같은 거리를 유지한다. 슬픔은 흰 테이블보 위로 흐르고 사람들은 그것 따위엔 관심 없다. 선은 부드럽지만, 무너질 듯하고 무너질 듯하면서도 색채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평면의 공간으로 지탱된다. 카페 창 옆으로는 흔들리는 세상의 기운이 밀려들지만, 뭉크 근처로 올수록 또렷해진다. 결국 그나, 나나, 우리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한다. 정신을 잃기 싶어지도 잃지 못한다. 

 

마음을 돌려먹고 다시 연락을 줄 지도 모르는 (어제 헤어진) 연인이 있거나,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거나, 자기가 억지로 세워놓은 어떤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텅 빈 술병은 곧고 바르기만 하다. 술병은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 안에 '술병'이 있는 지도. 

 

"Self-Portrait with Bottle of Wine", 1906 (Munch Museum, Oslo, Nor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