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자전거여행, 김훈

지하련 2008. 1. 6. 13:52

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2000


김 훈의 문장은 그 서정성의 깊이로, 그리고 그 문장의 우아함으로 언제나 여러 평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자전거 여행> 뒷 표지에 실린 정끝별의 글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오버'다. 늘 소설이나 시집, 혹은 산문집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평은 작가들의 영혼을 비켜나가선 스타카토 풍의, 뚝뚝 끊어지는 문장의 공허함만을 선사한다. 이번도 틀리지 않아서 '가히 엄결하고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든 가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 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라는 문장은 <자전거 여행>을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글쓴이가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가끔 몇 권의 책을 언급하지만 그건 잠시 지나가는 말일 뿐, 어떤 인문학적 성찰이나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 따위는 없다.

김 훈의 새로운 산문집 <자전거 여행>은 불행하게도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선택과 옹호>의 놀라운 문학적 통찰이나 <풍경과 상처>의 풍경 속을 파고 드는 문장의 밀도는 사라지고 세파에 시달리는 직장인 김 훈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잠시 세파를 잊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책들 중에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집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 훈은 내가 사랑하는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의 한 명이고 언제나 그의 책을 기다린다. 요즘 작가들은 너무 자신들을 소모시키고 스스로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진열되기를 원한다. 이것을 그들은 거리낌없이 '대중주의'라고 말한다. 김 훈은 그 곳에서 약간 비켜 서있으며 언제나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작가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과의 호흡'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다.

 - 2000년 8월 14일


7년이 지나는 사이, 김훈은 글 잘 쓰는 신문 기자에서 한국에서 몇 되지 않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가 썼던 책들, 대부분 잘 팔리지 않았던 몇 권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루이 뷔통 가방을 3분마다 하나씩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패션 전문가들은 '패션의 수준이 미성숙해서'라고 지적했다. (
http://news.media.daum.net/culture/others/200801/04/hankooki/v19495312.html) 이와 비슷하게 김훈 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표현 중의 하나로 '문화는 심심함을 먹고 자란다'라는 것이 있는데, '문화는 모험으로 성숙된다'도 포함되지 않을까. 문화 체험은 적당한 양의 모험이 요구된다. 익숙치 않는 책이나 음반을 한 번 경험해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성숙해질 수 있다. (좀 과격한 방법인가)
아마 2000년 이전에 김훈을 좋아했고 그의 글을 탐독했던 이들 중 일부는 지금의 김훈 인기를 낯설게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참 낯설다.

- 2008년 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