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지하련 2008. 2. 1. 17:44
프랑스적인 삶 - 10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밝은세상



프랑스적인 삶 Une Vie Francaise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 세상


1.
한 치 앞 미래를 보이지 못한다. 그저 예측할 뿐이다. 과거시제 형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설은 미래에 대한 숨겨진 공포를, 아찔함을, 내일을 향해 발을 내밀기가 무섭다고 독자를 향해 중얼거리는 양식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일의 삶을, 고통스럽고 미련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과거 시제 형 문학(후일담 소설/시)은 과거의 파란만장한 열정과 시행 착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합리화하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래서 이런 류의 문학을 접한 독자들 대부분 그들의 과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몇 독자들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느끼면서 감정적 공감을 형성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미래에 대해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결국 씁쓰레한 현실만 남게 된다. 독자는 그저, 작가의 철없는(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과거를 들었을 뿐이다.

문학이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이 세상, 우리들의 삶을 형성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드러내든가, 아니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 가치를 드러내어 주면 된다. 과거에 어떠했다는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 삶의 본질을, 우리 삶의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에 천착해야 된다. 하지만 내가 읽은 한국의 후일담 문학 모두 과거에 묶여 있었고 미래에 대한 한 마디로 하지 못했다. 오직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같은 실수의 반복으로의 미래가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과거에 대한 회한 만을 드러내었다.

2.
장 폴 뒤부아의 이 소설도 과거 시제 형 소설이다. 어린 시절, 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아내의 죽음과 정신병에 걸린 딸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소설도 미래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허무의 끝’(393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국의 후일담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할 지경이다. 그리고 미래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을 내딛는다. 미래에 대해서조차도 시니컬한 것일까. 그러나 이는 포기도 아니고 무모한 도전도 아니다.

‘시니컬함’(냉소주의)에도 급수가 있다. <<해변의 카프카>>가 결국은 환상 속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니컬하게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세상을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 든 하루키는 깨닫게 되지만, 소설을 변화시킬 힘도, 세상을 변화시킬 마음도 없이 그저 환상 속으로 숨겨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폴 오스터는 더 시니컬하다. 적어도 환상 따위는 만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거대한 현실을 긍정하고 타협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속에서 최소한 자기 자리만 만들고 싶어할 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을 훼손하지도 않고, 원래 시작했던 그 자리로 돌아온다.

장 폴 뒤부아는 어떤가.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자신이 살아가고 살아갈 현실 속에서 한 번도 발을 빼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때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폴 블릭은 끊임없이 시니컬하다. 현대 프랑스 정치와 일상 세계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아니면 소설가의 작법 때문일까. 과거 시제 형 소설이 가지기 쉬운 자질구레한 감정적 표현들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과거를 온전하게 과거로 받아들이기 하기 위한 장치일까.

시니컬하다고 해서, 폴 블릭은 도망치지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지도 않고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독자를 안타깝게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우리는 결국 현실적 삶 속에서 적극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극적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폴 블릭을 통해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3.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393쪽)


그래서 폴 블릭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저녁 파티가 어떠했는지, 거기 있던 사람이나 거기서 연주했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붉은 립스틱이 지워진 완벽한 계란형인 안나의 얼굴이다. 즉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운명을 끊임없이 무시할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유성遊星, 사슴 같은 눈을 가진 얼굴이다. 목은 또한 그녀의 몸의 모든 관절이 다 그렇듯이 가늘고 섬세해서, 전체적으로 마치 중력의 제 1 법칙과 일반 규칙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139쪽)



그의 아내 안나는 다른 남자와 몇 년 동안 숨겨진 연애를 하다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는다. 그 사고의 여파로, 딸 마리는 정신병에 걸린다. 폴 블릭은 책 인세로 모아두었던 모든 돈을 아내가 남기고 간 빚을 갚는데 다 써버리고, 어머니가 죽고 아들은 일본으로 가고, 딸은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폴 블릭은 소설이 끝날 때조차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내를 미워하지도 않고 정신병에 걸린 딸을 보며 울부짖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열정이나 애정을 애초부터 거세한 인물은 아닐까.

4.
하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한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장 폴 뒤부아의 문장은 서정적이고 위트가 넘치며, 시공간의 운동과는 무관한 인상을 풍긴다. 결국은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살아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정답이 없듯이, 소설은 과거에 대해서 변명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은 이미 결론 난 상태였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절망적인 파국이든, 폴 블릭의 삶이 산산조각 났다고 해서 그가 죽음을 끊고 자살을 택하거나 딸 마리를 버리거나 하는 짓 따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독자는 안다.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도 않고, 현실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우리 대부분도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끝까지 시니컬함을 버리지 않는 이 소설은 삶에 대한 거창한 교훈을, 미래에 대한 격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버리지 않는다. 과거와 똑같이 그렇게 살아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