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화요일 저녁

지하련 2006. 8. 22. 13:08
서점에 갈 때마다 인문서적 코너를 예술서적 코너로 향한다. 그리고 습관처럼 서양미술사 책을 뒤적인다. 하지만 전문 연구 서적을 부족하고 다들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싣고 있는, 얄팍한 깊이의 대중적인 서적이 대부분이다.

하나의 작품 속에 담긴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에서 17세기 대서양을 호령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부심, 우주의 끝까지 관통하는 이론을 만들었던 뉴튼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시작으로 17세기 유럽 전체의 상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18세기의 세계까지 예견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정도 되면 미술사나 예술사라는 학문이 어쩌면 철학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미술사 관련 책을 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틈날 때마다 책을 뒤적이곤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미술사와 전공자들이 공부한 미술사와는 매우 다른 모양이다. 나는 카스파 다비드리히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칸트 철학이 가진 낭만주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좋아하고 왜 19세기 초반 사람들이 급격하게 무신론으로 빠져들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장 안트완 와토의 그림, 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차르트의 감미로운 음악을 듣게 하길 좋아한다. 유미주의의 세계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실에서 상처 입은, 슬픈 자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길 해주는 책은 없다. 그래서 그런 책을 쓰고 싶은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나도 책을 쓸만한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책을 쓸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주 오래 전에 나에게도 열심히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한때 공부할 만큼 모아놓은 돈이 있었지만, 사업 한답시고 다 날려먹었다. 지금은 돈도 없고 공부할 시간도 없고 공부를 열심히 할 만큼 체력이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서양미술사 강의를 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해 준다기보다는 내가 먼저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그런 걸까. 강의는 재미없기 십상이고 때로 너무 어렵기 일쑤다.

몇 년 전에 공저로 미술사 책을 내긴 했지만, 내가 실으려고 했던 도판의 절반 이상이 실리지 못했고 (* 저작권 협의 및 이미지 확보 등의 문제로) 원고 초고도 형편없었으며 독자에게도 친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원고와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다시 강의를 하면서 새로 다시 고쳐 만들고 이를 정리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책을 써볼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 의욕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외로움이 심해진 탓일까. 아니면 나만큼 심한 에고이스트는 없는 탓일까.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걸까.

가끔 술자리에서 예술가들과 술을 마실 때, 그들보다 더 예술가 같은 내가 부담스럽다. 누군가가 날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누군가에게 날 들켰을 때 내가 보여주게 될 모습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이래저래 난 복잡한 인간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잡아보기로 한자. 더위가 물러나고 있으니. 술을 조금만 줄이고 운동을 조금 늘리고 내가 생각했던 바의 일들에 집중해야겠다. 잘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 저녁엔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내가 되고 싶어나 되지 못하는 바로크적 인간과 내가 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로코코적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역시 인간은 살려고 몸부림칠 때, 그 때 인간임을 자각하게 되는 모양이다. 아.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