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숭고에 대하여

지하련 2006. 10. 14. 11:40

 

 

최후Ultime는 실패인 동시에 약속이고, 버려짐인 동시에 구원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들에겐 구제자이기도 하다. 숨을 거두며 최후의 말을 남기는 사람은 그 말과 함께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곳으로 간다. 그는 패배하되 남은 이들이 거둘 수 있는 하나의 말을 남겼으니, 죽음이여, 너의 승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최후의 말은 통과를 위한 암호이다. 또 숭고의 도식이다. 우리는 파스칼적인 의미의 불균형disproportion에 용감히 맞선다. 그러자 그 위압적인 것이 음악적으로 변모하면서 무릎을 꿇고 만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이 한 마디 말에 의해 상쇄되다니. 그 때 그 말은 하나의 작품이나 다름없다. 어떤 조건 하에서는 내일 없는 패배도 패배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위압"의 관계가 전복하면서 "끝"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발생하여 그 끝이 지나가도록, 그럼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시작에 기여하도록 만든다. 그 순간이 바로 이중의 가치를 지닌 시간의 숭고한 지점이다. 결정적인 말은 그 순간에 비로소 전수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건은 증인을 요구하게 마련인즉, 증인이란 그 말의 수신자가 될 사람이다. 전수 가능한 것이 실제로 전수되도록 하는 요소는 언어의 파롤이기 때문이다. 파롤을 통해 증인은 듣고, 받아들이며, 그 결과를 랑그에 맡긴다. 그가 "임종하는 이의 입술에서" 새나오는 말을 거두는 것은 유언의 "실현"을 약속하기 위함이다. 그는 그 말의 "실현"에 실패하고 말리라. 대신, 후에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자에게 그 실패의 변형태를 전달하게 되리라.
- 미셸 드기, '고양의 언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 지성사), 21쪽에서 22쪽.

 

내 피곤한 육체를 기댈 수 있는 곳이란, 사각의 공간. 책들과 음반들과 낡은 오디오, 그리고 먼지를 먹고 있는 책상이 놓여있는 그 곳. 혼자 지내는 서른 중반의 사내 냄새가 공간의 틈새에 묻혀 곰팡이를 피우고 있는 곳뿐.

 

일주일에 마시기 시작한 와인, 이젠 거의 잊혀진 듯한 대우전자의 냉장고 속에서 며칠 동안 먹다 만 음식들과 함께 지낸 붉은 빛깔의 존재를 입술에 갖다되며 조심스럽게 '숭고'를 떠올린다. 숭고란 카스파 다비드리히나 터너의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형상. 바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없이 깊고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미사곡의 음율. 또는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정면성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그녀의 아름다움. 혹은 그런 기억들. 아픔들. 슬픔들. 아련함들. 칸트는 물자체를 이야기하면서 숭고란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그것을 공포로, 두려움으로 만들지만, 그리스인 롱기누스는 호메로스의 입을 빌려, 그것은 신의 세계로 향해 가는 인간의 죽음들, 또는 죽음의 의식이라고 풀이한다.

 

일상의 스트레스가 잠자리의 공포로, 일상의 쓸쓸함이 과도한 음주로, 폭력으로, 자해로, 고립으로 이어지다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도피로 이어지듯이 숭고란, 어쩌면 막연한 공포로, 고양이란 철저한 패배로, 철저한 좌절감으로, 극단적인 절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숭고는 현대적이지만, 끊임없이 고대적 언어로 되돌아가 버리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현대인에게 숭고란, 제어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 신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 신으로 위장한 시스템(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의)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면, 고대적, 근대적 의미의 숭고는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 끝없이 미끄러지는 상실감이 위치하게 되는 것.

 

하지만 다시금,

 

솟구쳐라; 못이여
물거품이여, 다리를 흔들고 숲을 삼켜라
검은 장막이여 오르간이여
번개와 벼락이여, 일어나 울려라
물이여 애통이여, 솟구쳐 홍수가 돼라
- 아르튀르 랭보

 

모든 남자를 사랑할 준비가 된 착한 술집의 여인처럼 이 밤 내 육체를 적시는 붉은 빛깔의 와인과 슬프고 격정적인 모짜르트의 오페라... 현대인이여, 우리는 다시금 신의 영역을 향해 달려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바로. 그 옛날 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