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12. 18

지하련 2006. 12. 18. 22:51
투명하게 건조한 겨울 대기를 뚫고 내려앉는 햇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내 머리는 아래로 푹 숙인 채로 6호선 상수역과 2호선 합정역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덜컹덜컹 매달린 몸뚱이, 추위와 쓸쓸함에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조그만 뇌를 가진 채로.

그가 낡은 담배를 내밀었다. 상수역에서 50미터 정도, 합정역 쪽으로 향한 뒤 마주할 수 있는 거친 표정의 편의점 앞에서. 그의 옆에 서 있는 미니스커트 아가씨는 스커트를 벗어 도로 바닥에 쌓인 검은 눈을 담고 있었다. 눈이 나에게 말한다.

그가 건네는 담배를 받지 말아요. 제발 받지 말아요.

나는 눈의 언어를 들을 수만 있을 뿐, 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에 대한 나의 상대적 실어증인가. 그의 옆에 서 있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날씬한 그녀, 미니스커트를 벗으면 들어나게 될 예정인 그녀의 다리가,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그녀의 하체, 혹은 아랫도리, 또는 존재의 미망.

담배를 물어 피운다. 끝 간 데 없이 높아지기만 하는 겨울 하늘의 공허 속으로 그, 그녀, 그리고 나는 몸을 날린다. 담배 연기에 몸을 싣고 흘러가는 우리들의 세월은 잡을 수 없고, 이미 검게 변해버린 눈들만 그 사연을 기억해줄 뿐이겠지만, 늘 시간의 사슬은 청춘을 묶은 채로 녹아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