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지하련 1998. 4. 18. 23:25

질투 - 10점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민음사


질투la jalousie
. 알랭 로브-그리예. (현대의  세계문학 9권. 범한출판사. 1988)
        
        
          * Pour Le Vide *
        
       
        01: 사라진 인물을 위하여
       
        그가 사라졌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었으며, 화자이며,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금  그는 소
     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지점에서  <<질투>>라고 이름붙여진
     이 소설의 모든 비평적인 글들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마당
     에, 비평적인 글들은 과연 소용있는 것일까?
       
        02: '질투'의 화신인 '그'
       
        그는 '질투'한다. 그의 아내에 대해. A는 그의 아내이다. 아니, 아
     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음으로, 그는  A에 대
     해 한 마디로 독자에게 하지 않음으로, 단지 그가 보고  있는 세계(표
     피表皮로서의 세계)를 그저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 A는  그의 정
     부일 수도 있다. 혹은 약혼녀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좋아하는 사
     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 혹은 추측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사라진 마당에 이 소설을 이
     해한다는 것이 과연 독자에게 무엇을 던져 줄 수 있겠는가.
       
        03: '지네', 혹은 질투의 고조高潮
       
        '지네'의 등장과 지네를 둘러싼 서술의 변화는 그의 질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부엌문은 닫혀 있다. 그 문과 복도의 활짝 열린 입구 사이에 지
     네가 있다. 커다란 지네로서,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놈 중의
     하나이다. 촉각을 뻗치고 거대한 다리를  쫙 펴면, 보통 크기의  접시
     표면을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중략)
        지네는 이미 위험을 눈치챈 모양이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
     는 것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촉각만  완만하고 연속적으
     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중략)
        (2)그 소리는 긴 머리칼  빗질하는 소리다. 비늘형의 빗살은  짙은
     갈색으로 반사하는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칼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면서
     머리 끝에 전기를 일으킴과 동시에, (중략).
        (3)두 개의 긴 촉각은 교대로 민첩하게 운동을 하고  있다. (중략)
     침묵 속에서 이따금 특징있는 소리가 들린다. 틀림없이 입의 부속기관
     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4)프랑크는 묵묵히 일어나서 타월을 집어든다. 그것을  둘둘 말아
     서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지네를 벽에다 눌러죽인다. 그리고 침실 바닥
     에서 그것을 발끝으로 비벼버린다.
        (중략)
        파란색으로 칠해진 박스형 자동차는 침엽수의 밑동에 충돌한다. 나
     무는 심한 쇼크에도 불구하고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5)즉시 화염에 솟는다. 자체  전부가 환하게 드러나고 탁탁  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진다. 그것은 지네가 내는 소리다. 지네는 또다시
     벽 위 널빤지 가운데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6)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는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슈우
     슈우하는 소리도 섞여 있다. 빗은 지금 잘 빗겨진  머리칼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 72쪽에서 74쪽(*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임).
       
        (1)지네의 등장과 그것의 소리는 (2)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러
     나 다시 (3)지네가 내는 소리이다. 하지만, (4)프랭크는  지네를 죽인
     다. 그리고, 몇 개의 단락을 거쳐 프랭크의 차가 침엽수의  밑동에 충
     돌한다. 나무와 차가 부딪히는 소리. 불타는 소리.  (5)그러나 그것은
     지네가 움직이는 소리이다. (이미  죽은, 아니면 새로  등장한)지네의
     소리이다. (6)아니다. 그것은 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는 '질투'한다. 그의 질투에는 끝이 없다. 소설 속의  세계는 그
     가 바라보는 세계이지만, 그의 질투로 인해 그 세계는  일상적 서술의
     세계가 아니다.
       
        04: 다큐멘터리적 자아/비-다큐멘터리적 자아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이 죽어 있다. 이 죽어 있음의  상태는 이전
     소설들-누보로망 이전의-과의 차이에 대한 표현이다. A는 그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서술하지 못한다. A는 그의 시선 속의 질투의 대상으로서
     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은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질투'
     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는 지금 '질투'에 불타고 있다. 불타는 카메라는 다
     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의
     세계는 죽어 있는 세계이지만, 질투로 인하여  과거/현재가 뒤섞이고,
     객관적 사실/주관적 상상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질투에 불타는
     카메라'때문이다.
       
        05: 그가 사라졌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며, 질투의 화신이다. 그는 이  소설의 숨겨
     진 작가이다. 하지만, 그 또한 소설 속 죽어 있는 세계 속의 일부분임
     으로 해서 죽어 있으며, 동시에 부재不在한다. 부재하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그 어떤  극적인 면도
     없으며, 그 어떤 감동도 없다. 감동을 느끼려 한다면, 이 소설과 이전
     소설과의 차이라는, 소설사적인 이해뿐이다. 하지만, 이  이해는 얼마
     나 감동적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평가적 입장-사치스럽고 부르조아적
     인-일 뿐이다. 보통의 독자에게는 이 소설은 수면제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뿐이다.
       
        06: '죽어 있음'(不在)
       
        '죽음'이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한다. 그것은 이 세계 속에서
     그 어떤 발언도 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러나, '죽어 있는  상태'로서
     이 세계에 참여(;발언)한다. 즉, 죽음은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
     하지만, '죽음'이라는 두 글자로서 이 세계에 현존한다.  이것은 인식
     론적 세계와 존재론적 세계의  갈등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를  인식한
     다. 그러나,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그의 두  눈과 두
     귀일 뿐이다(다큐멘터리적 인식). 그래서, 그는 A의  생각이나 프랭크
     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단지, 그 읽어냄은 표피로서의  세계을 바
     라본 결과일 뿐, 이것은 그가 읽어낸 세계가 거짓일 수 있음을 의미한
     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A와  프랭크와의 삼각형의 한 지점에  있다.
     이 질투의 삼각형 속에서 그는  세계를 읽어낸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인식한 세계를 그가 존재하는 저점을  통해서 변형시킨다(비-다큐멘터
     리적).
       
        07: '사랑'에 대한 절망
       
        그는 그가 있는 세계 속에서 소외된 지점에 있다. 그것은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A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그의 질투를  낳고
     그 질투의 눈으로 그는 A와 프랭크를 바라본다.
       
        08: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는 A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시에 이
     세계는 신에게서 버림받았다. 이 두 버림받음은 이 소설의  위치를 정
     해 준다. 그러나, 신은 이미 죽었고, A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
     았다. 그는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는 잘못된 소설이다. 질투하지  않기 위해, 그는 A와  프랭크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A의 사랑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그
     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니힐리즘'이다. pour le
     vide. 그러나, A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그의 앞에 서있다.



*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이다. 하긴 로브-그리예의 이 소설도 읽은 지 꽤 되었다. 하지만 그 때의 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들 중의 한 권으로 자리매김될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 리뷰를 다시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