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추억으로만 사네

지하련 2003. 5. 3. 22:03
후배가 먼 타지에서 추억으로만 산다고 한다.
추억에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할수록 삶은 견디기 힘든 어떤 무엇이 된다.
중년의 여자가 남편과 아이들을 보내고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여고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무섭고 슬프지만 조금은 감미로운 우울증의 베일이 그녀의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추억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갑자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내 몸 속에 있던 추억이 날을 세우고 일어나 내 속에서 내 밖으로 일제히 밀려나온다. 그러나 피부의 안쪽 면에 부딪혀 튕겨져 다시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추억들.
멍하게 사무실 구석에 앉아 기형도의, 오래된 시를 꺼낸다.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