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지하련 1999. 5. 3. 20:50
육체의 악마 - 10점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덕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랑이 모험이며 불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편에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사회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15살의 나는 19살의 마르트와 밤을 보내며 사랑을 찬미한다. 그러는 동안 어두운 밤하늘 아래 별빛들을 엮어, 쓸쓸한 전장(戰場) 위에서 자크는 혼자 신혼의 집에 남겨진 아내의 얼굴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는 기필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랑스런 마르트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것이다.

3. 행복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널 알기 전에 난 행복했어. 난 내가 약혼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용서했지.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너야. 내 의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내 의무란 내 남편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야. 가. 그리고 내가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마. 넌 곧 나를 잊을 거야. 네 인생에 불행을 초래하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우는데. 너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야."(p.67)

길거리 위에서 사랑에 빠진 그들은 그들의 사랑과 적대적인 세상을 속이기 위해 남매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임신한 마르트와 뱃속의 아이의 아버지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16살의 나. 사랑을 속이지 않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만 했고, 세상 속에 남아있기 위해 사랑을 속여야만 하는, 사회적 통념 하에서 허락되지 않고 오직 수다스런 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의 대상일 뿐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면서 파국을 향해 간다. 하지만 마르트는 불안해하는 나를 향해,

"나는, 너랑 있으면서 불행한 편이 그 사람과 있으면서 행복한 편보다 좋아."(p.162)

4. 존재이유(rasion d'^etre)

이 세상엔 사랑이란 없고 사랑에 속아넘어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껏 우아하고 아름다운 포즈를 연출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그 사랑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할 것이다. 마르트가 죽고, 16살의 나는 자신 앞에 놓여진 세상이 그 순간 빛을 잃고 침묵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無)으로 내려앉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믿는 순진한 자크는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죽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적이 되며 그 사랑을 죽인 세상은 오늘도 역겨운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몇몇은 우리들이 추구할 것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행위'이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끝내 발견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희망적인 우리들 중의 일부는 그렇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