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예감, 흔적

지하련 2003. 2. 4. 08:23
 
예감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시, 눈뜨다 예감>> <<시, 눈뜨다 흔적>>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다 여러 서점을 기웃거린 탓에 구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구할 수 있지만.

최근 나에게 시집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 있으니, 김화영 교수가 엮은 이 두 권의 시집이다.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인 지구
지구 위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
너 나에게 입 맞추고
나 너에게 입 맞춘
이 짧은 영원의 순간을
천년 만년이 걸려도
다 말하지 못하리
- 자끄 프레베르, <공원>



‘몽수리 공원’은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대학 1학년 때 시창작 수업 때 곧잘 듣던 단어였다. 그 때 시쓰기를 가르쳐주시던 분이 구상 선생이었는데, 학생들에게 ‘몽수리 공원’하면 그 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때 많은 시인들을 좋아했었다. 시를 쓰고 싶어했었고. 그러고 보니, 시창작수업에 들어간 날보다 술 마신 날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두 권의 시집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유하의, 참 유쾌한 시 하나를 올린다.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 유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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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도 절판이다. 오랜만에 보는 두 편의 시는 나를 즐겁게 한다. 그러고 보면, 유하는 참 시를 잘 썼는데.. (2011.2.26)